항목 ID | GC05901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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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判介 |
이칭/별칭 | 학순(鶴舜)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황미연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 장판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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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4년 - 장판개 원각사에서 활동, 혜릉 참봉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장판개 협률사에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장판개 전주 권번 소리 선생으로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37년 - 장판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0년 7월 30일 - 장판개 추모비 건립 |
출생지 | 장판개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연화리 |
출생지 | 장판개 출생지 -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 현정리 |
묘소 | 장판개 묘소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
성격 | 판소리 명창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전주 권번 선생 |
[정의]
개항기 순창 출신의 어전 광대이자 판소리 명창.
[개설]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연화리와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 현정리 출신 등 두 가지 출생설이 있는 장판개(張判介)[1885~1937]는 장석중(張石中)의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석중은 1903년 순릉 참봉 벼슬을 받았고, 할아버지 장주한 역시 참봉 벼슬을 받아 ‘음률의 명인’으로 불렸다. 동생 장도순 또한 판소리 명창이었는데, 한똑똑·신만산포·김일도·조정렬·조진영(趙眞榮)·박경수(朴敬洙)·김정문(金正文) 등과 함께 일명 ‘8잡기꾼’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의 예술적인 맥은 아들 장영찬(張泳讚)[1930~1980]과 조카 장월중선(張月中仙)[1925~1998]으로 이어졌다. 장월중선에 의해 전수된 그의 「수궁가」는 아직도 조카손녀 정순임(鄭順任)에 의해 불리고 있다. 4대에 걸친 판소리 명문이 탄생된 것이다. 이렇듯 장판개의 가계는 대대로 예술가 집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활동 사항]
1. 소리 공부와 원각사 활동
1885년(고종 22) 출생한 장판개는 천성이 예술가로 재질이 탁월하고 성음이 튼튼하며 성량 또한 풍부하였다. 명창으로서 장래성을 인정한 아버지 장석중은 송만갑(宋萬甲)을 선생으로 맞이하고 아들 장판개에게 소리 공부를 시키는 한편 거문고와 피리를 가르쳤다. 장판개는 3년 동안 송만갑에게 「춘향가」·「심청가」·「흥보가」·「적벽가」를 차례대로 배우고 순창의 산사로 들어갔다. 2년간 득음(得音)을 위하여 토굴 또는 폭포 앞에서 발성 훈련을 하였으나 실력이 미진하자, 송만갑의 수행 고수로 들어가 2년 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21세였던 1904년 스승 송만갑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원각사(圓覺社)에 참여하였고, 그 해 7월 스승의 주선으로 어전에서 그의 장기였던 「적벽가」를 불렀다. 화려한 차림새에 미남인 장판개는 아름답고 풍부한 성음 성량으로 절정의 기예를 발휘하였고, 멋과 귀태가 넘쳐흐르는 표현 동작, 즉 발림으로 인하여 고종을 비롯하여 삼정승 육판서도 크게 호응하였다. 특히 그의 판소리는 「적벽가」 ‘장판교 대전(長板橋大戰)’에 이르러서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신출귀몰한 묘기에 좌중이 탄성하였다고 한다. 고종은 장판개를 가상히 여기고 종9품 벼슬인 혜릉 참봉[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왕비 단의 왕후의 능,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소재]에 제수하였다.
원각사 폐쇄 이후로 장판개는 1908년 송만갑 협률사(協律社)에 참여하여 이름을 전국에 떨쳤고, 장안사(長安社)·연흥사(延興社) 시절에는 창극 공연에 참여하였으며, 창극 「춘향가」에서 이 도령 역을 맡아 춘향 역의 배설향(裵雪香)[1895~1938]과 열연하기도 하였다. 배설향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장판개의 제자이자 둘째 부인이었다. 당시 장판개는 소리도 잘했지만 발림이 매우 뛰어나 창극 배우로서 제격이었다.
2. 일제 강점기 후진 양성
일제 강점기 이후 일제의 식민 정책에 의하여 전통 문화가 옛 문화로 폄하되기 시작하면서 판소리도 위기를 맞게 되었다. 창극도 구 연극 혹은 구 파극이라는 이름 아래 광무대(光武臺)·장안사·단성사와 같은 극장의 주관으로 진행되었고, 기생 조합이 주최하는 기생 조합 연주회, 경서 구파 배우 조합의 기획 공연, 축음기 회사나 조선 음악 협회 같은 음악 단체 주최의 명창 대회를 통하여 명맥을 유지하는 환경을 맞게 되었다.
1920년대까지 극은 하루에 한두 막 정도씩, 한 작품을 며칠에 나눠 공연하는 이른바 토막 창극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1909년 일제에 의하여 판소리의 주요 무대가 권번(券番)으로 바뀌면서 판소리도 권번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명창들은 판소리가 활동사진[영화]과 신극(新劇)에 밀려 점차 쇠퇴하자 지방으로 낙향하여 활약하거나 기생방의 소리 선생으로 들어앉아 바야흐로 판소리 은둔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장판개도 1920년에 전주 권번의 소리 선생으로 가게 되어 제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제자 배설향과 전주 권번의 소리 선생으로 후진을 양성하던 중 지병이 악화되어 고향인 순창군 금과면 내동리에서 1937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장판개는 1935년 단가 「진국 명산(鎭國名山)」과 「흥보가」 중 ‘제비 노정기’를 녹음하여 음반으로 남겼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방울이 장판개에게 일본에 놀러 가자고 하여 갔다가, 음반이나 하나 후세에 남기자고 강권하여 억지로 넣은 것이라고 한다. 장판개는 녹음에 대하여 거부 반응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기량이 뛰어남에도 녹음으로 남긴 곡은 현재까지 이 두 곡뿐이다. 특히 이 소리는 젊은 나이에 아편으로 목이 망가진 장판개가 죽음을 앞두고 전력을 다한 소리가 담겨 있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 녹음한 임방울의 음반에도 장판개가 고수로 참가하여 북 가락을 남겼다.
장판개는 명창이자 명고수였으며, 거문고·대금·피리에도 정통하여 각기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그의 성음은 청미함은 말할 것도 없으며, 최하의 저음에서 최상의 고음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기예의 뛰어남은 가왕(歌王) 송흥록(宋興祿) 이후 독보적이라는 평이다. 장판개는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으며, 특히 「흥보가」 중 ‘제비 노정기’와 「적벽가」 중 ‘장판교 대전하는 대목’은 일품이었다고 전한다. 특히 ‘제비 노정기’는 그의 더늠으로 현재까지도 유명하다.
[묘소]
장판개와 부인 김옥란의 묘소는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스승 송만갑으로부터 정통 동편제 소리를 이어 받아 어전에서 소리하던 장판개는 원각사·협률사·장안사·연흥사 시절 다양한 창극 활동을 벌이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 음악사에서 신극이 태동하던 즈음 다양한 공연과 활동으로 판소리의 중흥을 모색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장판개는 송만갑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동편제의 적자가 된다.
장판개의 예술적 경지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높다 할 수 있다. 송만갑이 길러낸 제자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수제자를 꼽자면 장판개·김정문·박봉래(朴奉來)·박중근(朴重根)·송기덕(宋基德)·김녹주(金綠珠)·이화중선(李花中仙)·박녹주(朴綠珠) 등이다. 이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음반 자료로 비교 검토해 본다면 남자로는 장판개, 여자로는 김녹주가 가장 탁월한 기량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장판개는 어떤 면에선 스승 송만갑을 능가하는 부분이 있을 정도이고, 송만갑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할 만큼 절륜한 기예를 옛 음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판개를 추모하는 ‘학순 장판개 명창 추모비’가 순창군 금과면 매우리에 위치한 순창 농요 금과 들소리 전수관 마당에 위치해 있는데, 그 규모는 가로 642㎝, 세로 399㎝, 높이 163㎝이다. 이 추모비는 학순 장판개 명창 추모비 건립 위원회[추진 위원장 김수권]가 설립되어 2010년 7월 30일에 건립되었다. 또 매년 8월 16일 장판개 작고일을 기하여 간단한 추모 행사가 순창군 금과면 매우리 주민들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