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5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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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沙溪里胎室址 |
영어의미역 | Placenta Chamber Site in Sagye-r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사계리 산96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심현용 |
성격 | 태실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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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조선시대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사계리 산96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사계리에 있는 조선시대 태실 터.
[개설]
태실이란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면 의식과 절차를 거쳐 태(胎)를 묻은 시설을 말한다. 즉, 태(胎)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선이며 근원이라 하여 예로부터 소중하게 다루었는데, 특히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그 태를 전국의 길지(吉地)를 골라 태실을 만들고 묻었다.
태실은 아기태실(阿只胎室)과 가봉태실(加封胎室)로 구분되는데, 아기태실은 최초로 설치한 태실을 말한다. 아기태실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아기태실에 추가로 지상 가운데에 부도(浮屠)와 비슷한 석물을 치장한 후 팔각난간석(八角欄干石)을 돌리고 그 옆에 귀부가 있는 화려한 태실비를 세운 후에 가봉을 하는데 이것을 가봉태실이라 한다.
태를 봉안하는 제도가 시작된 시기는 문헌 기록상으로 신라시대 김유신의 태실부터로 확인된다. 이로 보아 늦어도 신라시대부터는 태를 봉안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실 장태(藏胎)의 풍속은 『고려사(高麗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 고려시대 문헌 기록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왕실에서의 태실 제도는 고려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왕실 장태 의식은 중국에서도 보이지 않는 우리 고유의 풍속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태를 땅에 묻는 풍속이 있는데, 당(唐)나라부터 확인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장태 풍속은 김유신의 태실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중국보다는 앞선다. 또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경지설(胎經之說)은 신라와 고려조 간에 시작된 것으로 중국 옛날 제도가 아니다”라고 명시하여, 우리나라의 장태 제도가 고유의 풍속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태실은 거의 조선시대 왕실의 태실로 대부분 한강 이남 지역인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집중되어 있지만, 성종 이후부터는 경기도와 강원도에도 태실의 조성이 있었고 예외적으로 황해도 지역에도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태봉(胎峰)의 조건은 무덤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의 명당 조건과는 달리 들판[野中]의 둥근 봉우리[圓峰]을 택해서 산 정상에 내맥(來脈)이 없고 용과 호랑이[龍虎]를 마주 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국속(國俗)으로 되어 있었다. 태실이 조성되는 태봉은 명당 조건에 따라 3등분으로 구분되는데, 1등급에는 왕의 태실, 2등급에는 대군과 공주의 태실, 3등급에는 왕자와 옹주의 태실로 나누었으며, 금표 구역 역시 태실을 중심으로 왕은 300보[540m], 대군과 공주는 200보[360m], 왕자와 옹주는 100보[180m]로 규정하였다.
[위치]
북면 사계리 평지마을과 잿마마을에서 남쪽으로 400m 가량 떨어진 해발 128m의 산봉우리 정상부에 있다. 울진읍 읍내에서 북면 방향으로 지방도 917호선을 타고 가다가, 호월3리를 지나 박금천의 고월교를 지나자마자 우회전한다. 약 3㎞ 정도를 가면 울진읍과 북면의 경계선에 사계교가 있으며, 사계교에서 서쪽으로 약 500m 거리에 사계리 태실지가 있다.
[현황]
사계리 태실지의 태봉은 천변에서 곳집골과 피밭골 사이로 삿갓 모양처럼 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이다. 주변에는 세천이 흐르며 논들이 형성되어 있다. 사계리 주민들은 이곳을 태봉재라고 부르고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태봉의 산 정상부에 약간의 평탄 대지가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무덤과 비슷한 봉분이 나지막하게 확인된다. 태봉 정상의 봉분이 태를 묻은 태함이 묻혀 있는 아기태실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사계리 태실지는 울진 지역에서 조사된 태실 중 봉분이 남아있는 유일한 태실로 태실 연구에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