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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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田洞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장수로[대전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재우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3월 1일 - 영천군 화동면 대전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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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81년 7월 1일 - 영천군 화동면 대전리에서 영천시 대전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1월 1일 - 영천시·영천군 통합, 도농 복합 형태의 영천시 대전동으로 개편 |
행정구역 | 대전동 -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 |
성격 | 법정동 |
면적 | 2.23㎢ |
가구수 | 177가구 |
인구[남, 여] | 411명[남 209명, 여 202명]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에 속하는 법정동.
[명칭 유래]
대전동(大田洞)은 큰 밭[한밭]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하며, 또는 이보흠(李甫欽)의 호 대전(大田)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대전동은 원래 영천 이씨가 주류를 이루던 마을로서, 조선 말기 13도제 실시로 영천군 명산면(鳴山面)에 속하였다. 1914년 3월 1일 영천군과 신녕군을 영천군으로 통폐합하면서 상대전동(上大田洞)·하대전동·오미동 등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대전리(大田里)가 되어 화동면에 편입되었으며, 1937년 7월 1일 영천면이 영천읍으로 승격되어 영천읍에 편입되었다.
1981년 7월 1일 영천읍 일원을 관할로 영천시가 설치되었으며, 이때 대전동은 오미동을 포함시켰고, 1989년 1월 1일 청통면 서산리가 영천시 대전동[서부동 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영천시 일원과 영천군 일원을 관할로 도농 복합 형태의 새로운 영천시가 설치되었으며, 1998년 10월 20일 교동과 대전동[오미동 제외]을 서부동에 편입하였다. 2011년 현재 대전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서부동 관할 하에 있다.
[자연 환경]
대전동의 상대전리 및 하대전리는 대전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서고동저 형태의 야산을 등지고 형성되었다. 대전동의 서쪽은 일명 구룡산(九龍山)이라고 부르는 야산이 버티고 있고, 바로 그 아래 길게 펼쳐진 마을로서, 신녕천과 고현천이 만나는 지역에 위치한다. 대전동의 동쪽은 고현천이 흘러 강 주변에 비교적 비옥한 평야를 만들고, 대전동의 서남쪽은 신녕천이 흘러가 금호강(琴湖江)에 유입된다. 대전동의 중앙부는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이 지형의 동편에 주로 사람이 거주해 왔다.
[현황]
대전동은 남쪽은 쌍계동(雙溪洞), 북쪽은 녹전동(錄田洞)과 접해 있다. 대전동의 면적은 2.23㎢이며, 인구는 2011년 말 현재 177가구, 411명으로, 남자가 209명, 여자가 202명이다.
대전동의 문화유산으로는 양계 정사(陽溪精舍)와 이대전 유허비(李大田遺墟碑)[일명 이보흠 유허비(李甫欽遺墟碑)], 호수 종택(湖叟宗宅) 등이 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88호인 양계 정사는 조선조 병자호란 때의 명신인 정호인(鄭好仁)을 추모하여 세운 정사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호인 이대전 유허비는 1629년(인조 7)에 건립된 높이 1.7m, 폭 69㎝, 두께 25㎝의 비로, 이보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인 호수 종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장군의 손자인 해남 현감 정호례(鄭好禮)가 건축한 공(工)자 모양의 건물이다.
한편, 대전동의 노거수로는 호수 종택 앞에 향나무가 있는데, 조선 후기의 유학자 정만양(鄭萬陽)이 심었으며, 수령 290여 년, 높이 12m, 둘레 3.5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