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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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驛院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철영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역사적으로 도로를 따라 발달한 마필 공급 및 숙식을 제공하던 장소.
[개설]
역원(驛院)은 역사적으로 주요 역에 설치하였던 여관 시설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교통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지리지에 5통문(通門)과 5문역(門驛)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 중 5통문의 하나인 염지통(鹽池通)은 경주의 정북방을 나타내는 감문역(坎門驛)에서 출발하여 골화소국(骨火小國)[지금의 영천]을 거쳐 의성·안동·영주를 지나 충주·원주·광주에 이르는 노선이었다. 즉 삼국 시대의 영천은 경주로부터 북방의 최일선에 이르는 경로의 요충지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는 영남대로(嶺南大路)에 포함되어 영천의 곳곳에 역원이 있었는데, 부산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영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한 영천은 일찍이 많은 역(驛)과 원(院)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 역원의 변천
역(驛)은 왕도와 지방 사이의 공문서의 전달이나 관용(官用) 물품의 운송, 공무로 출장 가는 관원(官員)의 왕래와 숙박의 일을 맡은 나라의 기관을 말하며, 그것이 제도화된 것이 역제(驛制)이다. 예컨대, 『삼국사기』 37권, 「잡지 6」지리조에 “평양(平壤)에서 국내성(國內城)까지 17역”이라는 내용이 있고, “소지왕 9년(487) 3월에 비로소 사방에 우역을 두었다”고 한 것을 볼 때, 삼국 시대의 역은 군사적·경제적 발전의 현실 형태로서의 관설 교통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 우역제도를 다시 정비하여 역로(驛路)를 대로(大路)·중로(中路)·소로(小路)로 구분하고, 각 역에 근무한 장정의 수를 정하는 한편,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역정(驛丁)을 두고, 군사에 관한 문서를 전송하기 위하여 서류를 넣은 가죽자루에 방울을 달고 달리는 현령식(縣鈴式)과 피각전송식(皮角傳送式) 제도를 정하여 이용하였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1458년(세조 3)에 역장의 칭호를 찰방으로 개칭하고, 또한 540여 개소의 역을 재편성하였다.
한편, 원(院)은 조선 시대에 여행의 편의를 제공하던 시설로, 객을 접대하는 각 주현의 객사(客舍) 이외에 각 요로(要路)에 공사(公私) 여행자의 숙식을 위한 원우(院宇)를 설치하였는데, 이 제도는 고려 때부터 있어 왔으나, 조선 초기 세종 조에 와서 거듭 정비하여 인근 주민으로서 원주(院主)를 삼고, 원전(院田)을 지급하여 원을 관리하게 하였다.
한편, 원은 공용(公用) 여행자와 상인 및 사용(私用)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왕이 지방을 순시할 때나 피난길에도 이용하였고, 각도 관찰사가 도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원에서 점심을 먹거나 마필을 교체하기도 하였으며, 신·구 관찰사[감사(監司)]가 경계 부근의 원에서 교대하기도 하였다. 이 원우는 각 고을의 수령이 자세히 살폈으며, 관찰사는 수령의 마음 쓰는 여부를 조사하여 출척의 자료로 삼기도 하였다.
원은 일반적으로 주요 교통로를 따라 분포되어 있었는데, 같은 도로라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지점에 주로 위치하고 있었다. 첫째 여행 중 날이 저물어 큰 산과 재[영(嶺)]를 넘지 못하고 일시 유숙해야 할 경우에는 원이 산 밑이나 고개 마루에 위치하였으며, 둘째 갑자기 홍수로 인해 하천이 불어나거나, 범람할 때 여행자는 대피해야 하므로 하천의 양쪽 가장자리에 위치하였으며, 셋째 원은 다른 수륙 교통 시설과 병존하는 것이 보통인데, 육로의 역참이나 해변의 포구 또는 해선의 승강처와 하천의 진(津)과 도(渡), 하천의 절벽 밑 돌길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각 읍마다 원(院)의 분포는 읍치(邑治)를 중심하여 사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주요 교통로가 아닌 일반 촌락에 위치한 원은 그 생명이 오래가지 않아 조선 후기에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2. 역원의 건축 형태
역원의 건축적 특성은 지방 각 읍의 치소(治所)에 둔 관아 건축을 바탕으로 하되, 각 읍이 가진 위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관련하여 남아 있는 사례가 없어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한제국 말에 촬영된 역참의 모습이나, 조선 시대의 풍속화 등을 통해 볼 때, 초가집에서부터 기와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일부 지역의 역에는 누각(樓閣)이 설치되어 휴식의 기능을 겸하기도 하였는데, 영천 청통역(淸通驛)의 동수루(東水樓)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특히 원(院)은 시대에 따라 사찰과 결부되기도 하고, 주막으로 변형되기도 한 것을 미루어 볼 때, 역에 비하여 훨씬 민간에 가까운 건축적 특성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후기에 들어 국가에서 설치한 원이 황폐하였는데, 그 이유는 상품 경제의 발달에 따라 원의 주위에 사설점(私設店)이 성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설점은 참점(站店)이라고도 하였고, 역과 원의 부근에 위치하여 도로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속칭 주막(酒幕)이라고도 불렀다.
역과 원의 관계는 국가적 입장에서 볼 때 공(公)·사(私), 상·하의 관계로 원보다 역에 더 비중을 두었다. 조선 시대의 원우(院宇)는 고려 시대의 사원(寺院) 또는 선원(禪院)이 원(院)으로 전환된 것도 있고, 개인 소유의 주택 혹은 누정 가운데 원우로 개조된 경우도 있으며, 관가 혹은 개인이 주관하여 원우를 신축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천의 역원]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영천 지역에는 청통역과 신역 두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청통역(淸通驛)을 비롯하여 청경역(淸景驛), 장수역(長壽驛) 등 세 곳이 있다고 하였다. 이 중 청경역은 초기의 신역이 이름을 바꾼 것으로, 결국 조선 초기에 비하여 장수역이 추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수역은 찰방이 머문 장수도(長壽道)의 중심역인데, 이에는 청통(淸通)·아화(阿火)·모량(毛良)·사리(沙里)·압량(押梁)·우곡(牛谷)·부평(富平)·청경(淸景)·구어(仇於)·화양(華陽)·의곡(義谷)·인비(仁庇)·경역(鏡驛)·조역(朝驛) 등 14곳의 속역이 있었다.
한편, 원은 제천원·보통원·적률원·요간원·오읍포원·신원·요광원·임하원·길상원·시천원·영등원 등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기록에만 전해지며 흔적은 현재로서는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