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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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碧珍李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집필자 | 전민욱 |
본관 | 벽진 - 경상북도 성주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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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효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평천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사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황정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봉정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봉죽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계지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계포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도암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해선리 |
세거|집성지 | 벽진 이씨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가수리 |
성씨 시조 | 이총언 |
입향 시조 | 이배원 |
[정의]
이총언(李忩言)을 시조로 하고 이배원(李培源)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시의 세거 성씨.
[연원]
벽진 이씨(碧珍李氏)의 시조는 고려 삼중대광 개국원훈 벽진장군(碧珍將軍) 이총언(李忩言)이다. 이총언은 858년(신라 헌안왕 2)에 태어나 938년(고려 태조 21) 81세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성주군 서쪽 명암방(明巖坊) 수촌(樹村) 태극봉 아래에 있었다고 하여 심혈을 기울여 묘소를 찾아 발견하였으나 확증이 없어 의총으로 남아 있다.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벽진장군 이총언이 신라 말에 태수로서 벽진고을을 보전하고 있을 때 도적의 무리들이 날뛰었으나, 성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들이 평안하였다.
이에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동심협력하여 환난을 평정하자고 설득하니, 이총언은 천명(天命)과 인심이 고려 태조에게 돌아감을 깨닫고 글을 받들어 아들 이영(李永)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쫓아 정토대업(征討大業)에 공을 세웠다.
고려 태조는 이총언을 벽진장군에 봉하고 이웃 고을의 정호(丁戶) 229호를 더 주고, 충주·원주·광주·죽주·제주의 창곡(倉穀) 2,200석과 소금 1,785석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친서를 보내어 금석 같은 신표를 보이면서 이르되, “자손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 변치 않으리라”라고 하니 이총언이 감격하여 군정을 단결시키고 군량을 저축하여 고성으로써 신라와 후백제가 반드시 쟁취하려는 지역에 끼어 있으면서도 흘연히 동남의 성원(聲援)이 되었다.
이로부터 벽진 이씨는 이총언을 시조로 하여 고려와 조선 시대 명문벌족으로 이름이 났다. 고려 때의 인물로는 판삼사에 오르고 고종이 친히 빙옥(氷玉)이라는 호를 내린 청백리 이극송(李克松), 충렬왕·충선왕·충숙왕 3대에 걸쳐 시(詩)로 이름이 높았던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이견간(李堅幹), 이견간의 동생으로 충선·충숙 2대에 중문지후(中門祗侯)·대장군을 지낸 이성간(李成幹)이 유명하며, 조선에서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이맹전(李孟專)이 널리 알려져 있다.
벽진 이씨로 영천에 처음 입향한 사람은 이맹전(李孟專)의 손자인 이배원(李培源)이다.
[입향 경위]
이배원(李培源)이 영천으로 은둔한 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다른 성씨와 마찬가지로 처가의 동네를 택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이배원의 장인인 김계돈(金季敦)은 계림 김씨로 영천에 입향한 김자양(金自養)의 아들이기에 자신의 터전에 사위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을 것 확률이 높은 때문이다.
[현황]
입향 이후 인물을 향지(鄕誌) 『영양지(永陽誌)』와 『익양지(益陽誌)』 및 『영천전지(永川全誌)』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입향조인 이배원(李培源)을 비롯하여 장사랑(將仕郞) 이의(李椅), 수직(壽職) 부호군(副護軍) 이수겸(李守謙), 생원(生員) 이희백(李喜白), 판관(判官) 이상백(李尙白), 내자시참봉(內資寺參奉) 이의백(李宜白), 통정대부(通政大夫) 이계근(李季根),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일장(李日將)과 이득룡(李得龍), 이득린(李得麟), 이득봉(李得鳳), 수직(壽職) 부호군(副護軍) 이덕함(李德咸), 수직(壽職)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경증(李景曾),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인묵(李仁黙), 학행이 뛰어난 향중에 추중된 인물로는 이수눌(李守訥), 이수인(李守認), 이호백(李好白), 이지백(李知白), 이잡(李磼), 이형항(李亨恒), 이태신(李泰新), 이명윤(李命尹), 이명계(李命啓), 이인화(李寅華), 이도화(李道華), 이석화(李錫華), 이유룡(李猶龍), 이현술(李玄述), 이현중(李玄重), 이문룡(李文龍), 이경안(李景顔), 이경직(李景稷), 이태일(李泰一), 이몽신(李夢臣), 이인발(李仁潑), 이인기(李仁器), 이국림(李國林), 이국채(李國采), 이윤적(李允迪), 이한현(李漢鉉), 이광로(李光魯), 이승일(李承一), 이상구(李祥龜), 이기인(李基仁), 이종기(李宗基) 등이다.
벽진 이씨는 6세 이실(李實)의 대에 이르기까지 관향인 벽진에 세거했으나, 7세 이방화(李芳華)가 홈실[椧谷]로 옮겨가 살았다. 그 후 9세 이당개(李唐蓋)가 금산, 영동에 자리를 굳히고, 10세 이극송(李克松)이 의성·성주·고령에 터를 잡아 살았으므로 그 후손들이 이들 지역에 나뉘어 살았던 것 같다.
1930년경에 이르러 벽진 이씨는 전북 남원군 덕과면, 경북 칠곡·김천·영천·청송·선산 일원, 경남 의령·창녕·거창·합천·양산·밀양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영천에는 자양면 노항리·성곡리·용산리, 임고면 효리·평천리·사리, 금호읍 황정리·봉정리·봉죽리, 청통면 계지리·계포리, 북안면 원당리, 고경면 도암리·해선리·가수리 등에 세거하였으나 영천댐 건설로 인한 수몰과 급격한 도시화로 현재는 집성촌이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대수가 줄어들었다.
[관련 유적]
영천시 자양면에는 용산리 원각마을에 생육신 이경은 선생 부조묘(生六臣李耕隱先生不祧廟)와 제단(祭壇)이 있고, 용계서원(龍溪書院)·원계재(圓溪齋)와 이지백(李知白)의 독락당(獨樂堂)과 이태일(李泰一)의 용산정사(龍山精舍)가 있으며, 성곡리 토골[土谷]에 입향조 묘재인 하천재(夏泉齋)와 의병대장 후은 이학로 선생 기념비(義兵大將後隱李學魯先生紀念碑)가 있고, 신방리에는 이수눌(李守訥)의 묘재인 추모재(追慕齋)가 있다.
영천시 임고면에는 평천리에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여 장렬히 전사한 이일장(李日將)[증 의금부도사]·이득룡(李得龍)[증 한성판관]·이득린(李得麟)[한성판관] 그리고 이득봉(李得鳳) 등 4사람의 유업을 기리는 사인정(四仁亭)과 이경증(李景曾)의 야은정(野隱亭)이 있고, 효리(曉里)에 이경직(李景稷)과 그의 아들 이국림(李國林)의 지지정(止止亭)이 있다.
영천시 고경면에는 도암리(道巖里)에 이일장(李日將)·이득룡(李得龍)·이득린(李得麟)을 비롯하여 이득봉(李得鳳)을 추모하여 세운 재사 추모재(追慕齋)와 삼충각(三忠閣)이 있고, 청통면 계지리(桂芝里)에는 이현중(李玄重)·이현필(李玄弼)의 상체정(常棣亭)이 있으며, 금호읍 황정리(凰亭里)에는 이의백(李宜白)의 봉강정사(鳳岡精舍)가 있다.
영천시 화룡동(化龍洞)에는 이수눌(李守訥)·이수겸(李守謙)·이수인(李守認)의 학면정(鶴眠亭)과 이희백(李喜白)·이상백(李尙白)의 체락정(棣樂亭)이 있는데, 모두 자양에서 이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