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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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栢巖祠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사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경재 |
건립 시기/일시 | 920년경 - 백암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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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0년경 - 백암사 복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5년 - 백암사 강의당에 김응택·권응수·권응심 봉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9년 3월 - 백암사 강의당에서 성인묘에 봉안 |
현 소재지 | 백암사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사리 |
성격 | 사당 |
양식 | 5량가|홑처마|소로수장|팔작기와집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5칸 |
소유자 | 의성 김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비지정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사리 마을에 있는 백암 김응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
[개설]
백암사가 자리하고 있는 사리마을[담골]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백암(栢巖) 김응택(金應澤)[1551~1597]의 자손들이 420여 년 간 세거해온 마을이다. 김응택의 본관은 의성. 자는 취용(就用), 호는 백암(栢巖)이다. 참봉 김순번(金順蕃)의 아들이며 임진왜란 때 백암산(柏岩山) 고성(古城)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천의 작산·도천 등지에서 적을 무찔러 정략장군, 훈련원 부정이 되어 권응수 장군과 함께 울산 반구정(伴鷗亭)에서 싸웠다.
[위치]
영천 시내 시청 오거리에서 포항·안강 방면 25번 국도를 타고 조교 삼거리까지 진행한 다음 임고면 방면으로 좌회전한 후 69번 지방도를 타고 4.5km가량 가면 임고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자호천을 건너는 양수교가 나오면 다리를 건넌 후 8.5km가량 진행하면 사리 삼거리에 이른다. 마을 초입 삼거리에는 입석이 서있는데 우회전해서 마을로 들어선 다음 250m가량 진행하면 길 좌측으로 백암사가 있다.
[변천]
백암사는 920년경 건립되었으나 대원군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던 것을 1920년경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1979년 봄 권응수·권응심 장군과 함께 귀천 서원(龜川書院)에 추향(追享)되었던 것을 1985년 백암사(柏岩祠)의 강의당(講義堂)으로 옮겨 봉안하다가 1989년 3월에 성인묘(成仁廟)에 봉안하여 재를 지내고 있다.
[형태]
백암사는 토석 담장을 둘러 일곽을 형성한 주 건물인 백암사와 삼문, 방형의 블록 담장을 따로 두른 성인묘가 일곽을 구성하고 있다.
백암사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5량 가 팔작기와집으로 평면은 전면으로 툇간을 반칸 두고 가운데 대청 좌·우로 방이 있는 ‘一’자형의 누각 건물이다. 구조는 경사진 대지에 두벌대 내지 세벌대 기단을 마련한 다음 자연석 초석 위에 누하주를 올린 형태로 기둥 상부에 창방을 돌리고 장여와 도리를 짜올려 서까래를 받도록 한 팔작 소로 수장집이다. 툇간 전면과 좌·우 측면에는 계자각 난간을 둘러두고 출입은 계자각 난간이 끝나는 배면 가장자리로 한다. 창호는 방 전면과 좌·우 측면에는 각각 쌍여닫이 띠살문과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았고, 대청 배면에는 쌍여닫이 바라지창을, 청방간에는 사분합 들문을 설치해 공간 활용도를 높였다.
성인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3량 가 맞배기와집으로 외벌대 내지 두벌대단 위에 초석을 놓은 다음 원기둥을 올리고 장여와 도리를 보와 결구한 형태이다. 창호는 성인묘 전면으로만 달았는데 어칸에는 쌍여닫이 굽널띠살문을 좌·우 협칸에는 외여닫이 굽널띠살문을 각기 달아두고 있다.
[현황]
백암사는 의성 김씨 문중의 지속적인 관리로 건립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으나 일부분에서 개변이 확인된다. 기단은 시멘트로 마감했고 처마 끝부분에 양철 물받이를 설치하는 등 증·개축된 부분이 확인된다. 성인묘는 건립 시기가 20세기 후반으로 건물은 양호하나 특색은 찾아보기 힘들다. 백암사와 성인묘 전면에는 백암사 유허비가 1기 있다.
[의의와 평가]
백암사는 20세기 초에 복원된 후 성인 묘를 따로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기 건립 당시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복원 당시의 모습은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건립 시기가 일천하지만 당시 건축 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