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7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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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甑山齋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포은로 1079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우경원 |
건립 시기/일시 | 조선 전기 - 증산재 토동(토골)에 창건, 1505년이란 설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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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조선 시대 추정 - 증산재 토동(토골)에서 자양면 성곡리로 이전 |
이전 시기/일시 | 1977년 - 증산재 영천댐 건설로 자양면 성곡리에서 임고면 삼매리로 이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7년 - 증산재 부속채와 문간채 증축 |
현 소재지 | 증산재(甑山齋)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포은로 1079 |
이전소재지 | 증산재(甑山齋)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
성격 | 재사 |
양식 | 장혀수장 |
정면 칸수 | 5칸 |
측면 칸수 | 1.5칸 |
문화재 지정 번호 | 비지정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에 있는 김자양(金自養)의 묘하(墓下) 재실(齋室).
[개설]
김자양의 자는 선군(善君), 호는 호연당(浩然堂)이다. 정숙공(貞肅公) 김인경(金仁鏡)의 7세손으로 태종 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통천 군수(通川郡守)와 청풍 부사(淸風府使)를 역임하여 치적이 있음에 그 지방 백성들이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김자양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영천시 도동에서 자양면 성곡리로 들어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위치]
증산재(甑山齋)는 지방도 69호선을 타고 영천댐 도착 700m 지점에서 좌측 길을 따라 100여m 들어가면 있다.
[변천]
『영천금석록(永川金石錄)』에 따르면 김자양은 영천 토동[토골: 현재의 영천시 도동]에 입향한 후 김자양의 재실인 구(舊) 증산재에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김자양은 자양면 성곡리에 이거(移居)하였는데 재실도 이건 또는 중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영천댐 건설로 성곡리 묘소 아래 있었던 증산재를 1977년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로 이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곡리에 있었던 재실은 아마도 재실만 있었던 듯하고 삼매리로 이건해 오면서 부속사와 문간채를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또 재실은 평면의 변화 없이 옛날 형식을 따랐다고 해 현재의 평면 구성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형태]
증산재는 동향한 3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 재사가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전면과 우측면에는 4칸 규모의 맞배 기와집인 부속사를 각기 배치하여 튼‘口’자형의 배치 형태를 이루게 하였다.
재사의 평면 구성은 중앙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방 2칸, 우측에 방 1칸씩을 드리고 전면 전체에 반 칸의 퇴를 둔 전퇴 형이다. 방 전면으로는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고 대청 전면에 사분합문을 달아 마루방으로 꾸몄다. 가구는 3량 구조에 장혀를 수장하였다.
[현황]
증산재 주위는 3면이 나지막한 능선으로 북·동·남을 감싸는 형태를 취하고 서쪽으로 열린 입지 조건을 취하고 있다. 평평한 대지에 시멘트 블록 담장을 두르고 마당을 중심으로 재사·관리사·대문채가 튼‘口’자형의 배치 형태를 이룬다. 1977년 성곡리에서 현 삼매리로 이건되면서 문간채와 부속채가 증축되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현재의 증산재는 두 차례의 이건으로 인해 창건 당시의 형태는 알 수 없고 성곡리로 이건된 이후 현 삼매리로 또 다시 이건되었다. 성곡리에서 현 삼매리로 이건될 때 재실의 부속채와 문간채가 증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재실의 평면 구성은 동일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바, 증산재는 조선 시대의 건축양상을 파악하는데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