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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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體育 |
영어공식명칭 | Physical Education |
이칭/별칭 | 스포츠 |
분야 | 문화·교육/체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채광수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이루어지는 체육 관련 활동과 제반 시설.
[개설]
영덕군에서 체육은 전통 시대에는 무예와 관련된 활동이 주였고, 일제강점기에는 학교 체육과 축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축구는 경상북도에서 명성을 날렸고, 8.15 광복 후에도 그러한 저력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2021년 현재 축구의 고장이라는 브랜드화에 성공하여 각종 축구대회와 전지훈련을 유치하는 등 지역 경제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전통시대]
전통 시대의 체육 활동에는 검무·검술·격구·궁술·석전(石戰)·수렵·창술 등 무예와 관련 있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이 시기 영덕 체육 역시 이러한 무예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영덕 지역에는 축산포와 오포에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어 있어 상당한 규모의 군사들이 상주했던 바 군사훈련이 병행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또한 지역의 『읍지』 풍속 조에 ‘궁마지향(弓馬之鄕)’ 명칭과 ‘검무지희(劍舞之戱)’ 가 있었다는 기록과 영해 독묘(纛廟)의 터는 지역 군사 체육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와 함께 영덕 지역은 다른 지역처럼 민속놀이가 성행하였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때 야구·축구·농구·배구·탁구·정구·유도·권투·수영 등 서양의 스포츠 종목들이 소개되고 정착이 되었다. 이때 영덕의 학교 체육 활동은 연중 1회 가을에 개최한 학교운동회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운동회의 주 종목은 육상 경기였다. 다음으로 영덕의 사회 체육 활동을 대표했던 축구가 경상북도 축구계에서 명성을 날렸다. 축구는 1936년부터 1938년까지 포항·안동·영덕에서 개최된 도내 각 시·군 대항 축구대회에 3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나아가 도내를 넘어 강원도까지 원정을 가서 우승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성행한 야구의 경우, 지품면 오천·신양리 등지의 일본 광업소의 일본인으로 구성된 광산팀과 영덕 읍내 청년팀 간에 1930년 이후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수 차례 경합을 벌였다.
또 1930년 국궁사수 기예 보유자 이사숙(李士淑)을 궁사(弓師)로 지방유지들이 영덕읍 남쪽에 있는 풍치림(風致林) 속에 사정(射亭)인 관덕정(觀德亭)을 세워 전통을 계승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전국대회, 경북도대회 등에서 우승을 하는 등 여러 차례 수상하였다.
그러나 일제(日帝)가 전반적으로 체육 활동을 통한 한국인들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함양을 억제했기 때문에 학교 체육만이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였다. 더구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에는 더욱더 체육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광복 이후]
8.15 광복 이후 1952년 3월 최남수(崔南壽)·이근석(李根錫)·이춘길(李春吉) 등 10여 명의 지역 인사들이 모여 영덕군 체육회의 결성을 결의하였고, 같은 해 5월 5일 민간단체로 결성이 되었다. 초대 회장 정기모(鄭基模), 경기이사 이춘길, 섭외이사 최남수, 구기 종목 이근석 등을 각기 선출하고, 10월 3일에 제1회 군민체육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체육회의 결성으로 지역 체육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불과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제5회 군민체육대회를 끝으로 해체되었다.
1963년 정부 방침에 따라 시장·군수를 시·군 체육회 회장으로 하는 관이 주도하는 체육회가 구성됨에 따라 새로운 조직체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여건상 군민체육대회를 개최할 역량은 갖추지 못한 까닭에 1963년부터 1981년까지 18년 동안 불과 5회만 열렸다.
반면, 1965년 관이 아닌 민간에서 주관한 체육 활동이 시작된 점은 고무적이었다. 영덕문화원에서 주최한 영덕군수기 타기 정구대회와 영덕검찰지청·영덕지원이 연합 개최한 정구대회가 그 일례이다. 이 대회는 1965년 영덕정구회 발족에 큰 영향을 준 대회가 되었고, 영덕문화원에서는 1970년 4월 영덕군수기 쟁탈 연식 정구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4월 정구대회를 열어 지역의 정구 동호인과 후진 양성에 일조하였다. 그러다가 1977년 영덕문화원에서 영덕정구회로 업무가 이관되었다. 이와 함께 1973년 9월에는 법원과 검찰청에 영덕군, 울진군, 영양군 대항 제1회 연식 정구대회를 개최하여 정구인들의 친목을 도모하였다.
1970년대에도 도민체전 등에는 육상을 비롯해 축구와 정구 등 일부 종목에만 선수를 파견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축구에서는 몇 차례 우승을 차지해 일제강점기 이래 이어온 영덕 축구의 명성과 자존심을 지켜 나갔다. 8.15 광복 후 영덕군에서 가장 활성화 된 체육은 바로 축구였다. 1954년 8월 각 신문 지국장들이 조직한 기우회에서 영남동해지구 축구대회를 1958년까지 개최한 바 있다. 1975년부터는 영남일보 영덕보급소 주최로 영덕군내 각 기관 단체, 초·중등 대항 축구대회를 개최하며 축구의 저변을 확대시켰다. 이에 1970년 영덕축구협회가 만들어지며, 매년 군내 각면 대항전은 물론 도민체전에 참여할 일반인 축구 선수를 선발하는 등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축구에 대한 열의는 영덕군 학교체육에서도 나타난다. 1960년대부터 교육청 주관으로 군내 초등학교 대항 축구대회를 개최하여 우수한 축구 인재를 발굴·양성하였다. 이는 자연스레 중등 축구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강구중학교는 1963년 도민체전 또는 지구별대회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972년 6월 제1회 전국 스포츠 소년대회 축구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강구중학교는 1980년까지 각종 대회에서 21회 우승을 거머쥔 축구 명문으로 성장하였다. 국가대표 선수와 감독을 지낸 신태용이 바로 강구중학교 출신이다. 이외에도 한국프로축구연맹 기술위원장 박태하, 수원FC 김도균 감독, FC서울 김진규 코치 등과 2021년 현재 현역에서 활약 중인 이명주·손준호·전은하 등이 영덕군 출신의 축구계 인물들이다.
이러한 축구 전통이 있는 영덕군에서는 축구 인프라에 대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단일 스포츠 종목 최초로 유소년 축구특구 지정은 그에 대한 노력의 보상이다. 영덕군은 2012년 강구대게축구장 완공을 시점으로 각종 전국대회와 전지훈련 유치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축구의 고장이라는 브랜드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2021년 현재 영덕에서 개최되는 국내외 대회는 한국중등축구연맹전, 소년축구대회, 중등국제대회, 대한축구협회장기 전국생활축구대회와 시대에 걸맞는 풋볼트립 전국드론 축구대회까지 개최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각종 축구대회와 전지훈련 유치는 지역 경제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편, 1966년 8월 영덕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창설되어 1967년 8월 대구시 교육장기 타기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해, 1978년 해체될 때까지 18회의 우승과 준우승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며 고장을 빛냈다.
1990년대는 군체육회와 생활체육의 활성화, 즉 체육동호인 모임이 활성화된 시기였다. 2021년 영덕군 체육회에는 현재 27개 체육 단체가 등록되어 있다.
군내의 체육 시설은 공공과 사립으로 구분된다. 2019년 영덕군『통계연보 』에 의하면, 공공 체육 시설은 육상경기장 2개소, 축구장 4개소, 야구장 1개소, 간이운동장[동네 체육 시설] 24개소, 체육관 3개소[구기체육관 1·투기체육관 1·생활체육관 3], 수영장 1개소, 국궁장 1개소 등이 있다. 사립 체육 시설[신고 체육 시설]로는 요트장 1개소, 수영장 1개소, 체육도장 9개소, 체력단련장 2개소, 당구장 13개소, 골프장 2개소가 운영 중이다. 이러한 체육 시설은 군민들의 체육 복지와 건강생활을 영유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