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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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津里 |
영어공식명칭 | Daejin-ri |
이칭/별칭 | 한나리,한날기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근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대진리는 영덕군 영해면의 가장 동쪽 북부에 자리한 해안 마을이며, 행정리는 대진1리·대진2리·대진3리로 분리되어 있다.
[명칭 유래]
대진리(大津里)는 동해 바닷가에 있는 큰 나루[津]이므로 한나리·한날기 또는 대진이라 하였다. 북쪽에 자리한 대진1리는 1580년(선조 13) 강씨(姜氏)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그 뒤 차씨(車氏)가 들어와 마을 형국이 공(公) 자 또는 공(空) 자로 생겼다고 하여 동명을 공수진(公須津)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옛날 귀공자가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고 하여 '공시계'라고도 부른다. 대진항 서쪽에 자리한 대진2리는 1620년경 김해김씨(金海金氏)의 김해은(金海銀)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남쪽에 위치한 대진3리인 건달(乾達)마을은 윤씨(尹氏)라는 인물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건달마을 본래의 동명은 건화동(乾花洞)인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관(官)에서 마을을 시찰하니 남아 있는 주민들이 실의에 빠져 하는 일도 없이 난봉을 부리고 건들건들 논다고 하여 건달동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대진리는 조선시대에는 영해부 읍내면(邑內面)에 속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 영해군 읍내면 지역이 되었다. 그 뒤 1914년 4월 1일 일제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공수진과 건달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대진동이라 하고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하였다. 1949년 8월에 지방자치제가 공포되어 대진1구·대진2구·대진3구라 하였으며, 1961년에 대진1동·대진2동·대진3동이 되었다.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대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환경]
대진리는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죽한 형태를 보이며,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 상대산[183.7m]과 남쪽 등급봉[162m] 등 대부분 지역에 높이 약 150m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북쪽의 송천(松川)이 동해로 유입되는 지점에 사주가 발달하고 있으며, 사빈으로 된 대진해수욕장이 있다. 해안선을 따라 귀바우·동남암·동북암·매미암·상투바우·설랑암·문암바우·개실바우·검덩바우·구들방우·꼭두바우·넙덕바우 등 크고 작은 바위로 된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대진리의 2020년 말 면적은 1.37㎢이며, 2021년 5월 기준 총 233가구[대진1리 67가구, 대진2리 91가구, 대진3리 75가구]에 384명[남 170명, 여 214명][외국인 제외]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괴시리와 연평리, 남쪽으로는 사진리, 북쪽으로는 병곡면 덕천리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대진1리와 대진2리 경계 지점의 바닷가에 있는 산수암(汕水巖) 바위 위에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1852~1914]의 도해비(蹈海碑)가 있다. 한편, 1982년 완공된 대진항의 방파제로 인하여 어선 출입이 수월해졌다. 주요 교통로는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대진리의 중앙을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며 대진항과 이어지는 도로와 상대산을 둘러싸고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