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181
한자 畝谷里
영어공식명칭 Myogok-ri
이칭/별칭 묘곡부곡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895년 5월 26일연표보기 - 경상북도 영해군 묘곡면 소속으로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14년 4월 1일 - 경상북도 영해군 묘곡면에서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동으로 편입
변천 시기/일시 1988년 5월 1일연표보기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동에서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로 개칭
성격 법정리
면적 12.85㎢
가구수 61가구
인구[남/여] 93명[남 42명|여 51명]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묘곡리영덕군 영해면 중앙에 자리하며, 행정리는 묘곡1리·묘곡2리로 분리되어 있다. 묘곡1리는 임진왜란 때 경주손씨(慶州孫氏)가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묘곡2리백일동(白日洞)마을은 조선시대 전응시(田應時)라는 인물이 마을을 개척하고 백일동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명칭 유래]

묘곡리(畝谷里)는 본래 묘곡부곡(畝谷部曲)으로, 조선시대에 묘곡면이 되면서 묘곡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묘곡리는 조선 전기에는 영해부에 딸린 묘곡부곡이었으며, 뒤에 남면(南面)에 속하여 묘곡리라 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 영해군 묘곡면(畝谷面) 지역이 되었다. 그 뒤 1914년 4월 1일 일제가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백일동·원상동(元上洞)·묘곡동 각 일부를 병합하여 묘곡동이라 하고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다. 1949년 8월에 지방자치제가 공포되어 묘곡1구·묘곡2구라 하였으며, 1961년에 묘곡1동·묘곡2동이 되었다.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묘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환경]

묘곡리는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동쪽은 높이 약 150m, 서쪽은 높이 약 400~450m, 남쪽은 높이 200~450m, 북쪽은 높이 약 250~350m의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초시골·무리골·건능골·약수개골·싱박골·석문지골·밀밭골·운곡골·모개나무골 등 크고 작은 골짜기를 형성하였다. 남천의 상류이기도 한 이 지역은 산지 소하천이 합류하면서 묘곡리의 중앙에 자리한 묘곡저수지에 모였다가 북동쪽으로 흘러나간다. 골짜기에는 곡저평야의 발달이 미약하고, 묘곡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남천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지류 하천의 합류 지점부터 북동쪽 경계지까지 넓은 범람원이 형성되어 있다.

[현황]

묘곡리의 2020년 말 면적은 12.85㎢이며, 2021년 5월 기준 총 61가구[묘곡1리 25가구, 묘곡2리 36가구]에 93명[남 42명, 여 51명][외국인 제외]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는 원구리벌영리 그리고 축산면 부곡리, 서쪽으로는 대리, 남쪽으로는 축산면 칠성리, 북쪽으로는 창수면 신기리와 경계를 이룬다. 남동쪽 용당산 자락과 북서쪽 산지 사이에 마을이 자리하면서 곡저평야 일부와 하천 일대 범람원을 따라 농경지가 발달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박씨신도비(朴氏神道碑)가 있다. 주요 교통로는 묘곡리 중앙을 북동-남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며 국가지원지방도 제69호선이 개설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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