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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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寧海義陣 |
영어공식명칭 | Yeonghae Righteous Arm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설립 시기/일시 | 1896년 2월 11일 - 영해의진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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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896년 8월 14일 - 영해의진 사천리 전투 패전 및 해체 |
최초 설립지 | 영해의진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
성격 | 의병 |
설립자 | 이수악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있었던 의병 부대.
[개설]
영해의진(寧海義陣)은 1896년 2월 11일 당시 영해군(寧海郡) 지역 유림들이 주축이 되어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결성되었다.
[설립 목적]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이른바 전기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당시 의병을 일으킨 보수 유림의 구호는 ‘토적복수(討賊復讐)[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을 것]’와 ‘보형보발(保形保髮)[두발과 복장을 가지런히 할 것]’이었다. 개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 내 역적들과 국권을 침탈하고 있는 일본 침략 세력들을 제거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고 고유 문화를 지켜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변천]
1896년 1월 22일 의병 전 단계로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집강소는 전통시대 유림의 유향소(留鄕所)의 집강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집강소는 도집강(都執綱) 1명, 부집강(副執綱) 3명, 찬획(贊畫) 4명 등 모두 169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영양(英陽)이나 청송(靑松) 등 주변 지역의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2월 11일 집강소 조직을 그대로 영해의진으로 전환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영해의진은 대장은 이휘일(李徽逸)의 주손(胄孫)인 이수악(李壽岳)이 맡았다. 병력은 의포(義砲) 44명, 중영의포(中營義砲) 54명, 포무영의포(砲武營義砲) 65명, 무사안(武士案) 14명 등 포(砲)별로 구성되었다. 각 포는 5~6대(隊)로 편제하였고, 각 대에는 10명 정도의 병사를 배치하였다. 영해의진이 전투를 시작한 것은 지휘부와 병사 조직이 완료된 1896년 3월 말부터이다. 이때 영해의진은 영덕의진의 원조 요청을 받고 이들을 도와주었다. 또한 4월에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기암리 보기암(洑基岩)에서 영덕의진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다. 5월에는 영해로 들어온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작전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해의진은 8월 14일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사천리 전투에서 관군의 습격을 받아 패퇴하였다. 이후 영해의진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해산하였다.
[의의와 평가]
영해의진은 특이하게도 집강소라는 사족 중심의 향촌 기구가 의병으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당시 영해 지역에서 가장 명망 있던 재령 이씨 가문의 주손이 지휘하였다. 영해의진은 지휘부 인원이 병사 보다 많았으며, 전투 의병보다는 시위 의병의 성격이 더 컸다. 이러한 대목은 전기 의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