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547 |
---|---|
한자 | 野城鄭氏 |
영어공식명칭 | Yaseong-Jeong Clan |
이칭/별칭 | 영덕정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기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548년 - 정담 출생 |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정담 사망 |
본관 | 야성 -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
입향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
성씨 시조 | 정가후(鄭可候) |
입향 시조 | 정곡(鄭鵠)|정진(鄭溍)|정담(鄭湛)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정가후를 시조로 하고 정곡·정진·정담을 입향조로 하는 세거성씨.
[개설]
야성정씨(野城鄭氏)는 정가후(鄭可候)를 시조로 한다. 야성은 '영덕'의 옛 지명이다. 현재 영덕군 내에 거주하는 야성정씨는 많지 않다.
[연원]
야성정씨는 고려 희종 때 대사도(大司徒)를 지낸 충간공(忠簡公) 정가후를 시조로 한다. 정가후는 일본을 정벌할 때 큰 공을 세워 야성군(野城君)에 봉해졌다. 이에 후손들이 야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야성은 영덕의 옛 지명이다. 정가후의 6세손 정송(鄭松)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때 공신으로 녹훈되어 야성백(野城伯)에 봉해졌다.
[입향 경위]
시조 정가후의 묘소가 영덕현 서쪽 궁촌에 있다고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정가후가 영덕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거주지와 묘소는 확인되지 않는다. 정가후의 11세손 정자영(鄭自英)[?~1474]은 1434년(세종 16)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장령, 성균관 사성, 공조참판,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며,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자영은 영덕현 사람으로 조선조에 대과에 급제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정자영의 손자 정윤의(鄭允義)의 아들 4형제 중 차남 정곤(鄭鵾)이 포천파, 3남 정홍(鄭鴻)이 장단파, 4남 정곡(鄭鵠)이 영덕파로 분파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조의 14세손이 되는 정곡의 후손들이 영덕에 많이 거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가후의 15세손 참봉 정진(鄭溍)이 무안박씨 박붕(朴鵬)의 여식과 혼인하여 사촌 정담(鄭湛)[1548~1592] 장군과 함께 창수면 인량리에 정착하였다. 정담 장군은 임진왜란 때 김제군수로 있으면서 웅치전투에서 적을 물리치고 전사하였다. 나라에서 병조참판을 추증하고 장렬(壯烈)이란 시호를 내렸다. 고을 사람들이 정담의 충절을 추모하여 향현사(鄕賢祠)를 세우고 야성박씨 박종문(朴宗文) 장군과 함께 제향하였다. 정담의 아들 정승서(鄭承緖)[1566~1640]도 곽재우의 화왕산성진을 지키고 문경 당교전투에도 참전하는 등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되었다. 야성정씨들 중에는 야성의 현재 지명을 취하여 영덕정씨라 칭하기도 한다.
[현황]
야성정씨는 영덕을 본관으로 하고 있지만 정작 영덕군에 거주하는 야성정씨는 많지 않다. 2015년 인구통계에 의하면 야성정씨는 전국에 1,934명, 경상북도에 360명, 영덕군에 3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영덕정씨로 응답한 사람도 전국에 1,674명, 경상북도에 223명, 영덕군에 3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관련 유적]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구미리 수정동에 시조 이하 묘를 실전한 선조들의 비석과 제단을 마련해 놓았다. 영해도호부에 향현사(鄕賢祠)를 설립하고 정담 장군의 위패를 모셨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인량리 마을 앞에는 숙종 대에 내려진 정담정려비(鄭湛旌閭碑)[경상북도 문화재자료]와 1999년에 건립된 정담장군사적비(鄭湛將軍史蹟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