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44 |
---|---|
한자 | 朴同伊 |
영어공식명칭 | Park Dongi |
이칭/별칭 | 박수원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진희 |
출생 시기/일시 | 1874년 9월 19일 - 박동이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박동이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41년 4월 22일 - 박동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3년 - 박동이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박동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
활동지 | 창수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동이는 1874년 9월 19일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이다. 이명은 박수원(朴永源)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9일에 일어난 창수면 3.1운동은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이수각(李壽珏)·이현설(李鉉卨)·이종구(李鍾龜) 등에 의해 주도되었고, 약 200명의 군중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사건이다. 창수동의 이수각(李壽珏), 신리동의 이현설(李鉉卨)과 권재형(權在衡), 인량동의 이현우(李鉉祐)는 동지를 규합하여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각 마을 주민들에게 권유하였다. 오후 4시 무렵, 약 200명의 군중은 각자 태극기 및 나무 몽둥이를 휴대하고 만세를 부르며 창수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창수동 구장 김재수(金在守)와 신리동의 권덕명(權德明) 등은 큰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주재소를 파괴하라고 독려하였다. 군중들은 창수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의 건물 및 기구를 파괴하였다. 그 결과, 창수주재소 사무실과 숙소 등 건물 세 동의 문·벽·천장·문등(門燈)과 게시판·변소·목욕탕 등이 파괴되고 유치장의 기둥 및 마당의 나무는 절단되었다. 사무실 서류와 기구, 총 3정과 대검 2정이 파손되었으며, 순사들의 가구·의류·식기 등을 전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만세 군중들은 오후 7시에 각자 귀가하였다.
3월 19일 박동이(朴同伊)는 창수주재소에 온 약 200명의 군중과 함께 한국독립만세를 부르짖었으며, 곧이어 창수동 출신의 나재성·박학래·박봉현·정석근·맹학근·김화원·남출이·백수학과 더불어 신리동의 이형우·김대지, 신리동의 정석출·우억만·윤순석·정재주·신갑수·오해봉·우주일·김도치·김덕규, 신기동의 이환이 등과 함께 주재소 서류·장부·공문서 등을 찢어 버리고 파기하였다. 뒤를 이어 박동이(朴同伊)는 신기동의 이환이·신갑수 등과 함께 순사 숙소의 목욕장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일제 경찰은 3.19만세시위 참여자를 대대적으로 체포하였고, 박동이(朴同伊)를 비롯해 96명이 재판에 회부하였다. 박동이는 4월 10일 대구지검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