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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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有金寺 |
영어공식명칭 | Yugeum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유금길 208-5[금곡리 815]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박병선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금곡리에 있는 사찰.
[개설]
유금사(有金寺)는 637년(선덕여왕 6) 왕의 명령으로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가 창건한 고찰(古刹)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末寺)이다. 유금사에는 보물[제674호]로 지정된 '영덕 유금사 삼층석탑(盈德有金寺三層石塔)'을 비롯해 지정문화재에 버금가는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금동주악천인상(金銅奏樂天人像) 등의 문화재가 있다.
[건립 경위 및 변천]
유금사는 637년 선덕여왕의 명에 따라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금을 손으로 주울 정도로 많이 캤다.”라는 ‘유금’ 마을에 지어져 사찰 이름을 ‘유금사(有金寺)’라 명명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대웅전, 종각, 장화부인 신령각 등을 갖추고 있었고, 승려도 수십 명 기거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느 날 주지가 불국사 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절 앞 용소(龍沼)에서 두 마리 용이 교미하는 것을 보고 요괴망측(妖怪罔測)하다고 꾸짖었는데, 절에 도착하기도 전에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로 절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 뒤 조선 중엽에 중건(重建)하였으나 소실되었고, 1627년(인조 5)에 중창(重創)하였으며, 1858년(철종 9)에 우인(愚寅)이 중수(重修)하였다. 1908년(융희 2)에 법당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으나, 주지 김화한(金華翰)이 중건하였다. 1973년에 대웅전과 기타 전각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3년 대웅전 중수 당시 천장 속에서 금서(金書)가 발견되어 대웅전이 1627년(인조 5)에 건립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유금사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의 기록은 없다. 다만 18세기 중엽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유금사는 영해부 북쪽 등운산(騰雲山)에 있다.”고 하였다. 이후 18세기 말의 『범우고(梵宇攷)』에 “유금사는 영해부 북쪽 12㎞[삼십 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19세기 초의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는 “유금사는 영해부 북쪽 등운산에 있다.”고 하였다. 19세기 말엽의 『영남읍지(嶺南邑誌)』에 “유금사는 영해부 북쪽 12㎞[삼십 리]에 있다.”고 하였고, 일제강점기의 『교남지(嶠南誌)』에는 “유금사는 등운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활동 사항]
유금사는 지방의 산중 사찰이며, 고령화와 인구의 감소로 신도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민을 위한 기부금 전달, 소외된 이웃을 위한 김장 나누기 행사 등의 대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유금사는 비구니 사찰로 작지만 아담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칠보산유금사(七寶山有金寺)’ 현판이 있는 서운루(棲雲樓)를 만나게 된다. 서운루는 유금사의 출입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기와지붕 양식이며, 2층이다. 1층 가운데 칸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정면으로 대웅전, 그리고 좌우로 향로전과 종무소 및 선방이 있는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은 유금사의 중심 불전(佛殿)으로 정면 3칸, 측면 2.5칸 규모의 팔작기와지붕 양식으로 석가여래삼존상을 봉안하고 있으며, 향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기와지붕 양식으로 금동석가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대웅전 뒤쪽에 보물[제674호]로 지정된 '영덕 유금사 삼층석탑'이 있었으나 2021년 현재는 해체·수리 중이다. 삼층석탑 뒤쪽의 삼성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지붕 양식인데, 원래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를 사모하던 장화부인의 넋을 기리는 산령각이었으나 지금은 삼성각으로 바뀌었다.
[관련 문화재]
유금사에는 보물 제674호인 '영덕 유금사 삼층석탑(盈德有金寺三層石塔)'이 있다. 영덕 유금사 삼층석탑은 이중 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신라 석탑 양식이다. 기단부와 탑신부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나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고, 근래에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여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각 층의 크기가 줄어드는 정도가 적당하며, 적당히 큰 기단부에 의해 안정감이 느껴진다. 각 기단의 면 가운데에 기둥이 하나씩 새겨져 있는 것과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4단인 것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탑으로 추정된다. 영덕 유금사 삼층석탑은 원래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대웅전 뒤쪽으로 옮겼다. 이때 탑에서 금동(金銅) 주악천인상(製樂天人像)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2017년 영덕 유금사 삼층석탑 및 사적지에 대한 정밀 발굴 조사 중 탑의 북쪽에서 유금사 초창기 금당지가 발굴되었고, 이곳 남서쪽 가장자리에서 9세기경의 금동여래입상 2구가 출토되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보급 금동여래입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영덕 유금사 삼층석탑 앞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배례석이 남아 있다. 긴 측면의 앞·뒷면에는 각 2개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짧은 면인 양 측면에는 각 1개의 안상을 얕은 부조로 새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