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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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蓮寺 |
영어공식명칭 | Cheongryeon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청련길 273[덕산리 735]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박병선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덕산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 소속 사찰.
[개설]
청련사(靑蓮寺)는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창건 연대나 규모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없다. 근대 시기에 재창건되었으며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건립 경위 및 변천]
청련사의 창건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청련사의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영덕군지』에는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고, 『달산면지』에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지리지나 사지(寺誌)에는 전혀 기록이 없고, 다만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편찬된 『교남지(嶠南誌)』 영덕군 사찰조에 "청련사는 덕산동(德山洞) 대궐산(大闕山)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96년에서 1899년 사이에 편찬된 『영덕군읍지(盈德郡邑誌)』에는 청련사의 존립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의병장 출신인 독립운동가 남석인(南錫仁)이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전국적인 의병운동이 전개될 당시에 의병을 모집하여 1906년 경주에서 영덕의 청련사로 진군하여 경주 출신 이한주(李漢主)가 이끄는 의병 30명과 합세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의병장 임용상(林龍相)은 김재서(金在瑞) 등과 영덕군 청련사에서 의병을 모아 동해창의군을 조직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어 영덕·청하·강구 등지에서 활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청련사는 적어도 1896년에서 1906년 사이 어느 해에 재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찬술된 신봉래[1878~1947]의 「청련사 산신각기」에 의하면 1933년 봄에 영덕 사람 김도수와 그 부인이 절의 외진 곳에서 허물어져 가는 산신각을 법당 뒤로 옮겨 다시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1936년 7월에 절을 증축하고 낙성식을 하였는데 그날 밤 대홍수로 산사태가 나면서 전 사찰이 파괴 수몰되었으며, 승려 등 22명이 죽고 생존자는 한 사람뿐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환란을 당하게 된 까닭은 낙성식 때 승려 중 한 명이 살생한 개고기를 먹어 천벌을 받은 결과라고 하였다.
그 뒤 청련사는 1954년에 대웅전을 중건하고, 1964년에 송광명화(宋光明華) 보살이 중창하였다고 하나 『영덕군지』에는 1960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1965년 산신각에 탱화를 제작 봉안하고, 2008년 나한전을 완공하였으며, 같은 해에 삼층석탑도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활동 사항]
청련사는 지방의 산중 사찰로 규모가 작고 교통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신도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다. 청련사에서는 매년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전달하거나, 주지 혜강이 시인으로 지역민의 마음을 위로하는 법회를 개최하고 있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청련사의 건물의 배치는 경사진 자연 지형을 잘 살려서 조성되어 있다. 사찰 입구 좌·우측으로 요사채와 종무소 등을 배치하고 그 안쪽으로 불전을 배치하였다. 청련사의 중심 불전은 대웅전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지붕 양식으로 석가모니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가운데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측에 관세음보살과 우측에 지장보살을 협시로 두고 있다. 또 대웅전에는 후불탱화를 비롯해서 신장탱화, 지장탱화, 독성탱화, 칠성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대웅전 좌측면 앞쪽에는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뒤쪽 좌우로 나한전과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기와지붕 양식으로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로 봉안하고 있으며, 부처님 10대 제자, 16나한, 오백나한을 봉안하고 있다. 산신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지붕 양식으로 산신탱을 봉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