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시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080
한자 野城詩社
영어공식명칭 Yaseong Poetry Society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남상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9년 전후 - 야성시사 결성 추정
해체 시기/일시 2010년 이후 - 야성시사, 자연 소멸 추정
최초 설립지 야성시사 -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면 남석리 지도보기
성격 시 창작 모임
설립자 정기모|문명기 외

[정의]

8.15 해방 이후 경상북도 영덕 중심으로 결성된 시 창작 모임.

[개설]

야성시사(野城詩社)는 8.15해방 후 정기모와 문명기가 영덕 지역의 별칭인 '야성'이란 명칭으로 결성한 한시 창작 모임이다.

[설립 목적]

야성시사에서 '시사'란 시(詩)를 짓고 즐기기 위한 모임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시는 사대부 문화의 표상이었다. 예술 창작의 기능을 바탕으로 정치와 교육, 사회 활동의 기능을 지니고 있으며, 취미와 오락 활동의 기능까지 갖고 있었다. 시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시사(詩社)는 그와 같은 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해 시인의 활동상을 살펴보면 모임을 결성하여 활동한 사실이 적지 않다. 시사임을 표방하지 않았더라도 많은 시인들은 크고 작은 모임을 결성하여 창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보통 문학 활동을 하는 문인들은 여러 창작 모임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모임의 구성원을 동인(同人)이라 하고, 그 모임을 시사 또는 시회(詩會)라 부르며, 그 모임을 결성하는 것을 결사(結社)라 불렀다.

일제강점기부터 8.15해방 이후에도 그와 같은 시사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사로는 경주 최부자 최준이 대구에서 결성한 아양시사, 다산 정약용의 죽란시사, 목포의 목포시사, 조선 후기 중인들의 송석원시사, 숙종 때 중인 임준원이 결성한 낙사시사 등이 있다. 그리고 영덕 지역에는 그와 같은 시 모임의 결사체로 8.15해방 후 결성된 ‘야성시사’가 있었다.

[변천]

야성시사의 결성자는 현재 전해 내려오는 자료가 부족하여 추정하기가 쉽지 않다. 『영덕군지』에 따르면, 야성시사의 최초 결성자는 영덕군 초대 군수를 지낸 정기모(鄭基模)와 영덕후생공사 사장 문명기로 추정하고 있다. 정기모와 문명기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면 남석리를 원적으로 하고 있었다. 정기모는 1903년생으로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를 졸업하고, 1925년 영덕군청 직원으로 출발하여 8.15해방 직후 초대 영덕군수를 역임하였다. 그뒤 사업에 투신하여 1958년에는 영덕화물자동차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문명기는 1878년생으로 일찍 한학을 익혔고 한시를 짓는 취미가 있었다. 문명기는 1950년 영덕화물자동차 사장, 야성시사(野城詩社)의 회장, 학림연합시(鶴林聯合詩) 회장, 영덕청년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영덕군지』에는 1981년까지의 회원 명단과 몇 편의 한시가 전해지고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영덕군지』의 기록에 따르면, "회원들 가운데는 전국 백일장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장두병(張斗柄), 윤병문(尹秉文), 김원숙(金元淑)이 있었으며, 유림회, 신라문화제 등 전국 규모의 백일장에서 입상한 분들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야성시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3일 삼짓날과 음력 9월 9일 중양절을 택하여 군내외 거주하고 있는 회원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한시(漢詩)를 지어 읊었으며, 또한 후배를 양성하는 데 진력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야성시사의 활동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전통과 명맥이 끊어지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현황]

『영덕군지』에 기록된 1981년도 야성시사의 회원 명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장(社長)에 정기모(鄭基模), 간사(幹事)에 김원숙(金元淑)이 활동하였고, 시원(詩員)으로 유석기(劉石基), 주세정(朱世正), 최병옥(崔秉玉), 윤병문(尹秉文), 유석엽(劉石燁), 홍예표(洪禮杓), 김석기(金錫基), 김병을(金炳乙), 박병규(朴丙奎), 이흡인(李翕寅), 윤형래(尹炯來), 이동석(李東錫), 김재철(金在澈), 김길수(金吉洙), 최윤기(崔潤基), 신홍기(申洪基), 임동욱(林東昱), 김효규(金孝圭), 김우영(金羽英), 김형원(金炯遠), 이명룡(李明龍), 윤병국(尹秉國), 이계종(李桂鍾), 윤덕규(尹德奎), 박재후(朴載厚), 김해주(金海周), 김중배(金重培), 김목석(金穆錫), 김시찬(金時燦), 김해수(金海壽), 박원근(朴元根) 등 총 33명이었다.

2000년도의 회원 명단을 살펴보면, 사장에 최윤기, 간사에 박노활이 활동하였고, 시원으로 홍예표, 최병옥, 신헌기, 김헌곤, 신홍기, 김효규, 조희원, 황정구, 윤중홍, 신종균, 권기달, 김호경, 김태규 등 총 15명으로 회원들이 대폭 줄어들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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