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대게의 원조마을 : 축산면 경정2리 차유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317
한자 盈德-元祖- : 丑山面景汀二里車踰-
영어공식명칭 The original village of Yeongdeok snow crab: Chayu Village, Gyeongjeong 2-ri, Chuksan-myeon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경정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4년연표보기 - 차유어촌체험마을 운영 시작
현 소재지 차유마을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경정2리 지도보기

[정의]

영덕대게의 원조마을로 알려진 영덕군 축산면 경정2리 차유마을 이야기.

[개설]

대게는 경상북도 북부에서 함경도 연안에 이르는 동해안의 냉수대에 분포하지만, 영덕군 축산면 경정2리 차유마을의 앞바다에서 잡은 대게를 최상품으로 친다. 그래서 차유마을에서는 예로부터 대게잡이를 중요한 생활수단으로 삼아왔다. 영덕군에서는 차유마을영덕대게의 원조마을로 지정하고, 어촌의 생활문화를 체험하는 학습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마을 입지]

차유마을영덕읍에서 동북쪽으로 약 15㎞, 영해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8㎞ 떨어진 자리에 있으며, 동해안 국도 제7호선으로부터 약 4㎞ 떨어져 있는 해안마을이다. 동해안의 해안마을이 다 그러하듯이 가파른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마을 주변에는 경작지가 거의 없다.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몇 가구가 안 되지만, 주로 마을 뒤편의 고개 너머에 있는 농경지를 이용한다. 마을 앞의 바다가 주민들의 주된 생활 터전이다.

차유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주민들 사이에 ‘안씨 터전에 권씨 골목’이라 구전되는 것으로 보아 안씨와 권씨가 처음으로 이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짐작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 현재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 중에는 김해김씨(金海金氏)와 영양천씨(潁陽千氏)가 가장 오래전에 이 마을에 입주하였다. 두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는 족보를 통해서 입촌조의 생몰연대를 추적해 본 결과 이들은 대체로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초엽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차유마을 김해김씨의 입촌조는 김중흥(金重興)[?~?]인데 자세한 이력은 알 수가 없다. 족보에 할아버지가 병조참판을 지냈고 큰아버지가 병조참의를 지냈는데 아버지는 관작도 묘소도 미상이다. 김중흥은 “광해조에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원주로부터 영해부 축산항에 유배되어 차유동에 은거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모종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17세기 중·후엽 귀양 온 것으로 추정된다.

영양천씨의 차유마을 입촌조는 천만흥(千晩興)[?~1800]이다. 영양천씨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부장으로 참전했다가 귀화한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다. 명나라가 망한 후 후손의 일부가 안동지방에 정착하여 세거하다가 18세기 초 천만흥이 차유마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천만흥은 98세로 장수하여 사후 노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이렇게 보면 두 성씨의 차유마을 거주 역사는 300여 년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거주 역사가 긴 만큼 마을 주민들 중에서 두 성씨가 차지하는 비율도 높아 오랫동안 이 두 성씨를 중심으로 마을을 경영해 온 듯하다. 그러나 산업화에 수반하여 농어촌 주민들의 이촌이 심해지면서 이 마을에서도 많은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천씨들의 이촌 비율이 높아 최근에 마을에 거주하는 천씨들이 많이 줄었다.

2000년에 조사된 차유마을의 성씨별 주민 분포를 보면 총 79가구 중 김해김씨가 25가구, 영양천씨 11가구, 밀양박씨 11가구, 경주이씨 7가구, 안동김씨 5가구, 기타 20가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2021년 8월 현재에는 가구수가 많이 줄어서 60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성씨별로는 김해김씨 25가구, 영양천씨 9가구, 밀양박씨 9가구, 경주이씨 7가구, 안동김씨 5가구, 기타 성씨가 5가구이다.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는 집도 14가구나 된다. 유입인구는 별로 없는데 노인들이 사망하거나 연로한 부모들이 자녀들을 따라 주거를 옮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차유(車踰)'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 영해부사가 소달구지[牛車]를 타고 마을 뒷산을 넘어[踰] 이 마을을 순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 전해지기도 하고, 또 일설에는 마을 뒷산의 지형이 소달구지의 길마와 닮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 마을을 ‘수구너미’ 또는 ‘수구미’라 부른다. ‘수구너미’라는 토속 명칭이 ‘수레넘이’라는 의미로 쓰여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789년(정조 13)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영해부의 지명으로 '차유진(車踰津)'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는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차유마을의 대게잡이]

차유마을은 영덕군에서 ‘영덕대게 원조마을’로 지정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게는 경상북도 북부에서 함경도 연안에 이르는 동해안의 냉수대에 분포한다. 수심 200~800m의 모랫바닥이나 진흙이 섞인 곳에서 서식하는데, 강구면에서 축산면에 이르는 연안에 서식 환경이 잘 발달하여 다른 지역의 대게보다 다리가 길고, 속살이 꽉 차 있을 뿐만 아니라 맛이 담백하다. 그중에서도 차유 앞바다의 수심 200m 해저에서 잡은 대게를 최상품으로 친다. 그래서 차유마을에서는 예로부터 대게잡이를 중요한 생활수단으로 삼았다.

인근 여러 해안마을에서 대게잡이를 시작한 것은 대게가 관광상품으로 부각되던 1980년대 이후이다. 그 이전 영덕 인근에서 전통적으로 대게잡이를 해 온 마을은 차유마을뿐이었다고 한다. 다만 강구항에서는 대형선박을 이용하여 먼 바다에 나가서 대게나 홍게를 잡는 원양어업 활동이 오래전부터 행해지고 있었다.

차유마을의 대게잡이와 관련된 역사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설화 몇 토막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일전을 겨룬 고창[안동]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영해 지역 토호들의 지원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여 영해 지방을 순시하였는데, 이때 차유마을에서 잡은 대게를 시식했다고 한다. 그때가 930년(태조 13)이라고도 하고, 940년(태조 23)이라고도 하나, 『고려사』에서는 순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 말 영해부사가 부임하여 관내를 순시할 때 소달구지를 타고 고개를 넘어와 대게를 대접받고 이름 없는 이 마을을 차유동이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조선 초기에는 지방 특산물로 대게를 진상하여 임금이 맛보게 하였으나, 대게를 먹는 왕의 자태가 점잖지 못하여 신하들이 더 이상 대게를 수라상에 올리지 않았다. 이에 대게의 맛을 잊지 못한 왕이 다시 대게를 찾아오라 명하여 수개월 헤맨 끝에 축산항 죽도(竹島) 부근에서 대게를 잡는 어부를 발견하였다. 이때 대게 다리가 죽도의 대나무 마디를 닮았다고 해서 ‘죽해(竹蟹)’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설화도 있다.

이러한 설화가 역사적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민초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살아 있는 역사이다. 영덕군에서는 이러한 설화에 바탕을 두고 차유마을영덕대게의 원조마을로 인정하고, 1999년 마을 오른쪽 바닷가 언덕에 ‘대게원조마을표석비’를 세웠다.

[차유마을이 간직한 어촌문화]

차유마을은 동해안 어촌마을의 문화적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 어촌 주민들은 거친 바다를 상대로 삶을 영위하기 때문에 나름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다.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생활문화가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명분과 형식을 중시하는 유교문화는 합리성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어촌마을에서는 발달하기 어려운 것이다.

바다를 상대하는 생업활동이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여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마음은 일반 농촌지역보다 더 간절한 면이 있다. 마을마다 골막이 신을 섬기는 동제나 풍어제를 지내고 있고, 조상신을 경배하는 의식도 매우 강하다. 차유마을의 풍어제는 19세기 중반 이후 중단되었지만, 동제는 일 년에 두 차례 음력 정월 14일 밤[대보름날 첫 새벽]과 9월 8일 밤[9월 9일 첫 새벽]에 마을 중앙에 있는 팽나무 동신목에서 지내고 있다. 그러나 조상제사를 위한 물질적 토대[위토]나 조직적 체계[문중]는 발달하지 않았다. 4대봉사가 일반화되어 있을 때에도 제사의 대상을 3대나 2대로 축소하는 경우가 많았고, 형제간에 조상제사를 나누어 모시는 제사분할의 관행도 널리 분포되어 있다.

차유마을은 혼인의례에서도 어촌마을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어촌마을의 혼인 관행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마을 안에서 혼인하는 비율과 어촌끼리 통혼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2001년에 조사된 차유마을의 혼입여성[차유마을의 남성에게 시집온 여성]의 결혼 전 거주지를 보면 총 66명 중 54명[81.8%]이 어촌마을 출신이며, 이 중 10명[15.2%]은 차유마을 안에서 혼인한 사례였다. 이 마을로 시집온 대부분의 기혼 여성이 같은 마을 출신이거나 인근 어촌마을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혼인 양상은 농촌지역에서 어촌마을과 혼인하는 것을 기피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촌생활에 쉽게 적응하기 위한 생존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차유마을은 대게잡이 원조마을로서뿐만 아니라 동해안 어촌마을의 생활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표본으로서도 큰 의미가 있다.

[차유마을의 오늘]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차유마을은 교통이 매우 불편한 오지였다. 바다를 통해서만 외부 사회와 소통할 수 있을 뿐 육로로는 차량 접근이 불가능하였다. 그나마 1981년에 해안 방어를 위한 작전도로가 개설되어 사정이 나아지기는 하였지만 좁은 비포장도로인 데다가 뒷산을 돌아 우회하여 승용차의 마을 진입은 여전히 힘들었다. 차유마을의 교통 사정이 원활해진 것은 이 작전도로가 마을을 통과하도록 노선을 변경하고 2차선으로 확장·포장하여 해안 관광도로로 개통한 1994년 이후의 일이다. 관광객들이 대형 버스나 승용차를 이용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영덕 군내를 순회하는 마을버스도 수시로 운행하여 주민들의 생활이 매우 편리해졌다.

마을 뒤편을 통과하는 도로가 확장 포장되어 개통되고, 대게원조마을로 지정되면서 마을의 모습은 크게 변모하였다. 이 시기는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관광산업이 활성화되어 영덕대게가 중요한 관광상품으로 부각되던 시기여서 대게철 주말이면 많은 관광객이 마을을 찾았다. 주민들은 대게잡이와 대게판매로 소득이 크게 향상되었다. 2021년 8월 기준 이 마을에는 대게잡이를 위한 3~4톤 규모의 어선을 소유한 가구가 17가구나 된다. 문어통발이나 오징어잡이, 자망어업 등을 위한 1톤 미만의 소형 어선을 소유한 가구도 14가구나 되어 60가구 중 31가구가 어선을 소유하고 있다.

대게찜을 주로 하는 횟집도 9가구나 된다. 전화로 주문을 받아 택배로 배달하는 통신판매도 적지 않다.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숙박 수요도 증가하여 마을 뒤쪽에 모텔이 들어서기도 하였지만, 주민들은 낡은 재래식 가옥을 현대식 양옥으로 개축하거나 신축하여 관광객에게 민박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렇게 민박을 운영하는 가구도 10가구나 된다. 대게잡이 선주가 횟집을 운영하면서 민박도 겸하는 가구도 여럿이다. 연로한 노인가구를 제외하면 주민의 다수가 대게를 중요한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차유마을 주민들은 대게잡이와 식당 운영에 머무르지 않고 현장학습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발을 맞춰 2004년부터 ‘차유어촌체험마을’을 운영하였다. 대게잡이 체험을 비롯하여 통발 체험, 고둥잡기 체험, 물따개비따기 체험, 풍등날리기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대게원조마을에서 대게도 맛보고 어촌생활도 체험한다’는 구상은 많은 도시인들에게 신선한 매력을 던져주었고 찾아오는 관광객도 늘어났다. 이렇게 주민들이 합심하여 노력한 결과 2006년도와 2008년도의 체험마을 전국 경연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선하여 마을어촌개발사업 자금을 두 차례나 지원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차유마을도 2015년을 고비로 걱정거리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걱정거리는 주민들의 고령화 문제이다. 기존의 주민들은 점차 고령화되어 은퇴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데, 어민 후속 세대는 성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게잡이 어선도 2000년에 23가구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17가구로 줄었고, 소형 어선을 소유한 가구도 19가구에서 14가구로 줄었다. 어촌체험마을을 운영할 젊은 인력도 충원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차유마을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활기찬 어촌마을의 모습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을까 주민들은 걱정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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