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552 |
---|---|
한자 | 金俊 |
영어공식명칭 | Kim Jun |
이칭/별칭 | 김인준(金仁俊)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고려 후기 영주 출신의 무신.
[개설]
김준(金俊)[?~1268]은 무신으로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崔竩)[?~1258]를 죽이고 최고 권력자에 올랐다.
[가계]
김준의 출생 연도와 본관은 알려지지 않으며, 천예(賤隸) 출신이라고 한다. 초명은 김인준(金仁俊)이다. 아버지 김윤성(金允成)은 최충헌(崔忠獻)[1149~1219]의 가노였으며, 동생은 김승준(金承俊)[김충(金沖), ?~1268]이다. 부인은 두 명인데, 한 명은 확인할 수 없고, 나머지 한 명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환자(宦者) 김인선(金仁宣)[1200~?]의 조카이다. 김준은 여섯 명의 아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김주(金柱)[?~1268]와 김석재(金碩材)[?~1268], 김대재(金大材)[?~1268]는 첫 번째 부인의 아들이다. 우부승선을 지낸 김애(金皚)[?~1268], 장군 김기(金祺)[?~1268], 장군 김정(金靖)[?~1268]은 두 번째 부인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김준은 용모가 늠름하고 성품이 관대할 뿐만 아니라, 활쏘기를 잘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 일찍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에 점점 유협자제(遊俠子弟)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다 박송비(朴松庇), 송길유(宋吉儒) 등에게 천거되어 최고 권력자 최이(崔怡)로부터 전전승지(殿前承旨)를 제수받게 된다. 그러나 최이의 폐첩인 안심(安心)과 간통한 것이 드러나,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에서 몇 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후 복귀한 김준은 최항(崔沆)[?~1257]이 권력을 잡는 데 공을 세우게 되고, 얼마 후 별장에 보임되었다. 하지만 최항을 이어 집권한 최의는 김준을 멀리하였고, 이에 김준은 점점 불만을 품게 된다. 1258년(고종 45) 류경(柳璥)[1211~1289], 박송비 등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는 데 공을 세웠다. 이에 위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우부승선에 올랐다.
김준은 1259년(원종 즉위년) 원종이 즉위하자 위사공신 1등으로 승격하였으며, 추밀원부사 어사대부 주국 태자빈객 익양군 개국백(樞密院副使御史大夫柱國太子賓客翼陽郡開國伯)에 봉해지고, 식읍 천 호와 식실봉(食實封) 백 호를 받았다. 1263년(원종 4) 수태위 참지정사 판어사대사 태자소사(守太尉參知政事判御史臺事太子少師)에 임명되었다. 1264년 몽골에서 원종에게 입조를 지시하자, 김준이 원종을 위해 대관전에서 인왕백고좌강회를 강설하였다. 원종이 충성을 가상히 여겨 김준을 교정별감으로 삼고 국가의 비위를 규찰하게 하였다. 1265년 원종이 환국하자 김준에게 시중을 제수하고, 해양후(海陽候)에 봉하였다.
이렇게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오른 김준은 본인은 물론 자신의 일족까지 나서 탐학을 일삼고, 나아가 궁에 바치는 내선(內膳)까지도 탈취하는 등 전횡을 일삼기 시작하였다. 1268년(원종 9) 몽골 황제가 사신을 보내 징병을 지시하고, 김준 부자와 동생 김충에게 입조하라는 칙서를 내렸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김준은 몽골 사신을 죽이고 원종까지 시해하고자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원종이 임연(林衍)[?~1270]과 강윤소(康允紹)[1237~?] 등을 시켜 김준을 척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