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64 |
---|---|
한자 | 民族靑年團 |
이칭/별칭 | 조선민족청년단,대한민족청년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용철 |
[정의]
1948년 강원도 영월 지역에서 설립된 청년 단체.
[개설]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은 1948년 강원도 영월군에 조직된 우익계 청년운동 단체이다. 1946년 10월 6일 이범석(李範奭)[1900~1972]의 주도하에 반공(反共)과 남한의 정치 지도 세력 양성을 목표로 조직되었으며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이라고도 한다. 조직 규모는 1948년 말 기준 130만 명에 달하였다. 영월에는 1948년에 지부가 조직되었다.
[설립 목적]
민족청년단은 ‘남한을 안정화시키는 대중장악기구(大衆掌握機構)’이자, 장기적으로는 ‘향후 한국의 지도 세력을 양성하는 조직’을 목표로 조직되었다.
[변천]
민족청년단은 1946년 10월 6일 발족 당시 약 300명의 조직으로 시작하였으며, 1947년에는 30만 명, 1948년 말에는 130만 명까지 증가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민족청년단에서 대한민족청년단(大韓民族靑年團)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나, 1948년 12월 21일 이승만(李承晩)[1875~1965] 대통령의 명령으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의 창단과 함께 대한민족청년단을 포함한 청년 단체들에 대하여 해산 명령이 떨어지자 1949년 1월 20일 해체되었다. 영월 지역에는 1948년 지영관을 단장으로 조직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민족청년단은 창설 이후 ‘비정치 청년운동’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에 따라 지역 봉사활동과 단원 훈련 활동을 주로 하면서 ‘현실 정치’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중심이 되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공고화되는 1947년 이후로는 남한단선(南韓單選)에 대한 참여를 준비하는 정치적 활동에 주력하였고, 실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후보를 배출하여 전국적으로 여섯 명의 당선자를 배출하였다. 단, 영월의 경우 민족청년단으로 입후보한 사례는 없다.
[현황]
1948년 영월 지역에 민족청년단이 조직될 때 단장은 지영관이었다.
[의의와 평가]
민족청년단은 광복 이후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되던 상황하에서 반공과 추후 남한의 정치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며, 마찬가지로 영월에 조직된 민족청년단의 존재는 광복 이후 영월 지역의 좌우익 대립과 우익 청년 단체의 상황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