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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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眞身舍利, 法興寺 寂滅寶宮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법흥로 1352[법흥리 422-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홍성익 |
[정의]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법흥리에 있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
[개설]
법흥사는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법흥리에 있는 사찰이다. 조선 시대 부처의 진신사리 신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로 집중 조명을 받았다.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법흥사]
법흥사라는 명칭은 흥녕사에서 개칭된 것이다. 흥녕사는 흥녕선원을 줄여 부르는 명칭이다. 흥녕사는 두 가지의 중요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부처의 진신사리를 가져와 흥녕선원에 봉안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징효대사가 사자산문을 개산하였다는 것이다. 흔히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 강원도 정선군 정암사, 강원도 인제군 봉정암, 강원도 평창군 상원사,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법흥사를 5대 적멸보궁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통도사·월정사·정암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자장율사와 관련된 기록이 보이고 있어서 진신사리 신앙과 결부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지만, 봉정암과 법흥사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지점에 건물 또는 석탑을 건립하고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칭하면서 진신사리 신앙은 널리 확산되었다.
실제 창건의 기록은 882년 경에 대선사 석운(釋雲)이 자신이 있던 흥녕선원을 징효대사에게 머물도록 요청하자 이에 응하여 제자를 이끌고 와서 많은 사람을 모아 큰 사찰로 성장시켰다고 한다. 징효는 흥녕선원에 오기 전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금강산 장담사(長潭寺)에 머물던 철감도윤(澈鑒道允)을 찾아가 제자가 되고 곡산사(谷山寺)에 머물다가 흥녕선원을 수행처로 삼으면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흥녕선원을 중창하게 된다. 하지만 신라 말기에 사회가 매우 혼란해졌으므로 징효는 흥녕선원도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스승인 도윤선사가 입적한 전라남도 화순군 쌍봉사(雙峰寺)로 떠나 조령에 머물던 시기에 흥녕선원은 불에 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후 중국으로 유학을 하고자 하였으나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인천광역시 부근으로 돌아와서 은강선원에서 입적하였다. 징효의 다비(茶毘)를 치르고 사리 1100여 과를 수습하였으나 흥녕선원으로 바로 오지 못하고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림사(桐林寺)에 안치하였다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정국이 안정되는 944년이 되어서야 징효의 부도와 부도비가 건립되어 흥녕선원이 사자산문의 본산으로서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산선문의 형성 과정과 형성 시기에 대한 인식의 문제는 현재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또한 흥녕선원이 사자산문의 중심 사찰로 활동하였는냐와 사자산문의 개산조가 징효대사냐의 문제도 학계에서 여러 견해가 있어 왔지만,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 불교계의 대세를 이루었던 불교의 양상은 남종선을 받아들인 선종불교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산문을 구산선문이라고 하는데, 구산선문은 사자산문을 포함하여 가지산문, 실상산문, 희양산문, 동리산문, 봉림산문, 성주산문, 도굴산문, 수미산문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산문 중에서 수미산문은 신라가 아닌 고려 태조 때에 성립하였고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의 진감혜소는 당나라에서 일찍이 귀국하여 산문을 형성하였음에도 구산문에 포함되지 않았다. 또한 실상산문·희양산문·동리산문·도굴산문은 각기 실상사는 홍척, 봉암사는 지증, 태안사는 혜철, 굴산사는 범일에 의하여 개산되었고, 각기 개산조가 되었다. 하지만 가지산문의 개산조인 보조는 강원도 양양군 진전사의 도의와 도의의 제자인 염거를 각기 1대와 2대 스승으로 삼고 있으며 사자산문의 개산조인 징효는 전라남도 화순군 쌍봉사의 도윤선사를 스승으로 하고, 봉림사의 개산조인 심희는 경기도 여주시 고달사의 현욱을 스승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에 해당하는 선승은 각기 산문의 개산조가 되었다. 이에 흥녕선원 역시 사자산문의 개산 사찰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으나, 최근에 사자산문의 개산 사찰을 쌍봉사로 하고 개산조를 철감도윤선사로 보려는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가지산문이나 봉림산문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산선문의 역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본다면 사자산문의 개산 사찰은 흥녕선원이고 개산조는 징효대사로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징효대사의 생애]
흥녕선원의 경내에는 사자산문의 개산조인 징효대사의 부도와 부도비가 현존하고 있다. 징효는 826년에 황해도 봉산에서 출생하여 847년 이후에 금강산의 장담사에 머물던 도윤선사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882년 경 석운대선사의 요청으로 흥녕선원에 머물게 되면서 흥녕선원은 사자산문의 개산사찰이 되고 징효는 개산조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징효는 891년에 흥녕선원에서 스승이 입적한 쌍봉사로 떠난 이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900년에 인천광역시의 은강선원에서 입적하였다. 징효는 입적하고 44년이 지난 944년에서야 징효의 사리가 흥녕선원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비문이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에 있고, 징효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가 영월 징효국사 부도이다.
부도는 팔각원당형이라 이름하는 양식으로 만들어졌는데, 하대석부터 옥개석에 이르는 전체 부재가 8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구산선문의 개산조 부도와 비교하면 하대석과 상대석의 연화문이 단순화되고 부도의 탑신에서 위와 아래를 둥글게 처리하여 당대에 직선으로 치석한 것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옥개석에서도 기와골이 생략되었으며 귀꽃에서도 문양 처리가 단순화되고 있다. 영월 징효국사 부도는 이렇게 전체적인 양식에서 변화가 보이고 있지만 징효대사가 900년에 입적하고 부도는 944년에 건립되는 것을 감안하면 시기적으로 약식화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단지 적멸보궁이 있는 권역에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각원당형 부도가 있어서 이와 비교 검토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는 부도의 동남쪽 20m 거리에 있다. 비문의 내용은 징효대사의 일대기를 비교적 세밀히 기술하였고, 당시의 정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도 담고 있어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용머리가 조각된 옥개석을 놓았다. 받침돌의 역할을 하는 거북이의 머리는 용의 머리에 가깝고 여의주를 물고 있다. 거북이의 등은 육각형의 문양을 가득 채우고 둥글게 조성되었다. 옥개석에는 네 마리의 용이 중심을 향해 마주 보고 있다. 이는 ‘태종 무열왕릉 비’로 시작되는 석비의 양식사에서 900년대 중반의 석비 양식을 파악하는 데 역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법흥사로의 개칭]
흥녕선원이 법흥사로 개칭된 시기를 알 수 있는 자료는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1750년과 1863년에 편찬되는 『해동지도(海東指圖)』와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법흥사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1799년과 1830년 경에 편찬되는 『범우고(梵宇攷)』와 『관동지(關東誌)』에서는 흥녕사로 표기하여 조선 후기에 흥녕선원이 법흥사로 사명이 바뀌었지만, 이전 사명인 흥녕사가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02년 비구니 대원각이 중창한 이후에 법흥사로 정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법흥사의 문화유산]
법흥사에는 많은 문화유산이 전하고 있다. 이 중에 패엽경(貝葉經)이 전하고 있는데 제작 시기와 전래 과정 등이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패엽경은 한 장으로 앞면과 뒷면에 범어로 쓴 경전이다. 패엽경에는 중간 부분에 둥근 구멍이 2개가 있는 것으로 볼 때 티베트 불교의 사원에서 승려들이 독경을 할 때 읽는 경전과 같이 패엽경을 위로 넘기면서 읽을 수 있도록 여러 매를 실로 묶여 있는 경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와 같이 원래는 1매가 아니고 여러 매로 구성된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패엽경은 금강산 마하연사(摩訶衍寺)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1945년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금강산이 북한에 포함되자 남쪽으로 가져와 부산에 있던 어느 승려가 신도에게서 구하여 법흥사에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금강산의 사찰은 고려 말에 원나라의 많은 지원을 받았으므로, 이 패엽경은 고려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강원도는 남종선이 신라에 전래되고 정착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구산선문 중에서 도굴산문은 강원도 강릉시 굴산사(崛山寺)에서 범일국사가 개산하고, 사자산문은 징효대사가 강원도 영월군 흥녕선원에서 개산한다. 가지산문은 보조체징이 전라남도 장흥군 보림사에서 개산하지만 1조 원적도의와 2조 염거는 각기 강원도 양양군 진전사(陳田寺)와 선림원(禪林院)에 주석하면서 가지산문의 선대 사찰로서 산문을 열고 있다. 충청남도 보령시의 성주산문을 개산하는 낭혜무염은 강원도 양양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출가하였다. 봉림산문 개산조인 진경심희는 설악산과 강원도 강릉시에 머물며 수행하고 홍각은 강원도 양양군의 선림원에서 입적하였다. 자적은 강원도 강릉시 흑암선원(黑岩禪院)에서 진경을 만나 제자가 되었으며, 진공은 강원도 원주시 흥법사(興法寺)를 중수하고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희양산문의 개산조 지증도헌은 강원도 거돈사(居頓寺)의 전신 사찰인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다가 입적하는 등 강원도 지역은 남종선불교가 전래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상사적 측면에서 흥녕선원은 남종선이 전래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굴산산문의 굴산사와 더불어 강원도 지역에 정착하는 산문으로 중요한 사상사적 가치를 지닌다.
[의의와 평가]
흥녕선원은 사자산문의 개산 사찰로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왕실과 여러 지역의 다양한 호족들이 단월 세력으로 후원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어서 당시 산문의 형성 과정과 그 세력권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2002년 이후 지속적으로 지표조사와 발굴 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결과를 보면 사자산문의 개산 사찰로서 유적과 유물이 현전하고 있어 역사적 위상이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