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463 |
---|---|
한자 | 麗水復縣十八人同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장여동 |
[정의]
조선 말기 여수현을 다시 설치하기 위하여 벌인 동맹 운동.
[역사적 배경]
1896년 2월 완도나 돌산 같은 섬마저 군이 되었으나 여수 만은 열심히 복현 운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설군(設郡) 문제가 실패하여 여전히 순천부 관할에 묶이게 되었다. 이에 형편에 맞지 않은 조정의 처사에 분개하여 1896년 3월 18명이 고장의 비원을 풀기 위해 동맹하였다.
[발단]
전라남도 여수현에서 발생한 삼복삼파 이후 1864년 정종선의 여수현 복현 상소를 계기로 1887년(고종 24)에 맹렬한 복현 운동이 벌어졌다. 이때에도 순천부의 거센 방해 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복현 운동의 주동자인 최창모(崔昌模), 정동열(鄭東烈), 유봉의(兪鳳儀) 등 세 지사(志士)만 화를 입고 유금(流禁)되었다.
[경과]
1896년 3월 18명은 ‘만약 뜻을 이루지 못하면 고기밥이 되리라(事不若成 藏於魚腹)’는 비장한 각오로 복현 운동에 나섰다. 18명의 동맹자는 정시홍(鄭時洪)·유하열(柳河裂)·정충섭(丁忠燮)·유민열(柳敏烈)·주봉성(朱鳳成)·황안성(黃安性)·김병두(金秉斗)·정지섭(丁芝燮)·유계열(柳啓烈)·정시현(鄭時鉉)·황운수(黃雲秀)·김재호(金在浩)·최현호(崔炫浩)·황의연(黃義淵)·정관영(鄭寬榮)·정관섭(丁寬燮)·주재석(朱載錫)·정시행(鄭時幸) 등이다.
이들 맹원(盟員)들은 서울로 올라가 관계 요로와 손을 잡고 맹렬하게 복현 운동을 벌이는 한편 일부는 지방에 남아 진정서를 작성하여 각계에 보내고 지방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때 마침 초대 돌산군수로 임명된 조동훈(趙東勳)이 도임차 여수 종포에 도착하였는데 맹원들과 지방 유지들이 합세하여 조동훈에게 성찬을 베풀며 애원하였다.
즉, 여수는 동학란으로 시가지가 온통 불타버렸고 주민들은 생활의 터전을 잃고 허탈에 빠져 있는 데다 1895년에 설상가상으로 전라좌수영 마저 폐쇄되어 여수 백성들은 부모 잃은 자식처럼 의지할 관부가 없고 백리에 가까운 순천에 속해 있으니 차라리 이 고장도 돌산군에 편입시켜 함께 다스려 달라는 것이었다.
조동훈은 여수 백성들의 처절한 호소를 인정상 뿌리칠 수 없어 “이곳도 다 같은 이 나라 땅이거늘 내 어찌 경계만 논할 수 있겠는가?”하고 절박한 사실을 전라감사와 조정에 보고하여 여수 4면(율촌, 소라, 삼일, 여수)도 돌산군에 편입시켜 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백성들을 돌보고 진남관의 허물어진 부분을 손질하는 등 여수 군수로서의 직무에 충실하였다.
[결과]
고려 때부터 있던 여수현이 1397년(태조 5)에 폐현되어 순천부에 예속된 후 500년에 걸쳐 순천부와 전라좌수영 두 관청의 부역과 조세를 이중으로 부담하는 폐단이 이어졌다. 이에 분개한 18인의 복현 운동의 결과로 1897년(고종 34) 5월 16일 마침내 여수군(麗水郡)을 설군하라는 칙령(勅令) 제12호가 공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