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4093 |
---|---|
한자 | 孟斗燮 |
이칭/별칭 | 맹원섭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신갈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종구 |
[정의]
광복 후 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기흥 지역에서 청년운동을 펼친 인물.
[가계]
신창 맹씨 호군공파 17세손으로 조부는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유학자이며 교육자인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이고 아버지는 맹이술,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다.
[활동 사항]
광복 직후 국가행정력이 미치지 못할 즈음 1947년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이 대동청년단을 조직 운영할 때 용인군 신갈 지대장을 역임하며 기흥 지역 치안을 유지하는데 기여 하였다.
지대장을 맡으면서 기흥면 각리의 청년들을 소집하여 밤이면 현 신갈동 상미마을에서 치안 유지를 위한 훈련을 실시하며 기흥 지역 치안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 일부를 청년단이 맡아 불하를 하게 되자 논밭을 징용 갔다온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불하 후 남은 땅 3천 여 평을 단원들이 지대장 맹두섭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이는 명분이 없는 일이라 거절하고 교육을 위해 사용하라고 신갈초등학교에 3천 평을 주어 현 신갈초등학교 부지가 되게 하였다.
한국전쟁 와중에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좌, 우익의 갈등이 첨예 할 때 기흥 대한청년단 총무인 한의(韓醫)가 좌익이며 친구인 정(鄭)씨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청년단원들이 복수를 하려 할 때 맹두섭은 그들도 우리 주민이라 극구 말리어 막았으며 이로 인해 9.28수복 후 좌익에게 당한 우익들의 복수극이 있을 때 다른 지역과는 달리 피 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막아 기흥 지역을 평화로운 마을이 되게 하였다. 이는 맹두섭의 애민정신의 결과이다.
맹두섭은 가난한 일생을 살았으나 아버지 묘소라도 참배하고 할아버지 맹보순을 독립운동 수훈자로 하기 위해 노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95세로 영면 하였다.
[묘소]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산리 산 25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