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3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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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음역 | Joseon Sidae |
영어의미역 |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조준호 |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경기도 용인 지역의 역사.
[연혁]
1413년(태종 13)에 용구현과 처인현을 병합해 만들어진 용인현은 수원진영(水原鎭營)에 소속되었으며 남양부(南陽府)에서 관할하였다. 수원진에 부속된 시기에는 16개 면을 종5품의 현령이 다스렸으며, 훈도(訓導) 1명을 두었다. 1872년(고종 9)에 작성된 『용인현읍지(龍仁縣邑誌)』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걸로 보아 이와 같은 행정 구역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양지현은 조선 초에 고서면 봉림산(鳳林山) 아래로 치소를 옮기고, 양산(陽山)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훈도관이 관장케 하였다. 이후 1470년(성종 원년)에 다시 치소를 북쪽 50리에 위치한 주동면 금박산(金箔山) 아래로 옮기고 추계(秋溪)로 개칭하였다. 이때부터 현감을 두어 6개 면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 뒤 죽산군의 목악면·박곡면·제촌면·고안면 등 4개 면을 분할받아 모두 10개 면의 규모가 되었다.
이후 1560년(명종 15)에 폐현되어 이천부에 통합되었으나, 4년 후인 1564년에 복현되었다. 이때 치소를 서쪽의 정수산(定水山) 아래로 옮기고 이름을 양지로 고쳤다. 1871년(고종 8) 간행된 『양지현읍지(陽智縣邑誌)』를 살펴보면 읍내면(邑內面)을 신설하여 모두 11개 면을 갖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사제도]
용인은 예로부터 군사적 중요 요충지였다. 경도와 부산을 잇는 동남로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몽골군의 남침 경로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의 북상 경로로서 주요 격전지였다. 따라서 용인 지역의 군사 기반은 중요시되었다.
세종 대에 용인현의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 66명, 선군(船軍) 76명이었으며, 양지현의 군정은 시위군 37명, 선군 68명이었다. 이후 영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군병조에는 중앙의 군제와 같은 칭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군인의 수도 크게 늘어나 있었다.
1871년(고종 8)에 간행된 『경기읍지』에는 창용향보(蒼龍餉保)에는 양인 791명, 노비 558명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보(砲保)에는 양인 74명, 군향보(軍餉保)에는 양인 3명, 분양마보(分養馬保)에는 노비만 20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군기의 경우 조총 150자루, 남성통(南星桶) 100개, 이약통(耳藥桶) 100개, 화승 100사(沙) 이내, 철환(鐵丸) 10,000개, 화약 100근 이상을 무진년에 새로 비치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당시 빈번했던 외세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경제]
용인 지역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되며, 개간한 땅이 5,988결이다”라 하고 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토지의 결수가 격감하고 있었다. 이는 농민들이 조세에 부담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인 지역의 토산물로 실[絲]·삼베(麻)·지황(地黃)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용인의 특산품은 주로 농업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상업 경제가 발달하면서 충청 지역과 도성 지역을 연결시켜주는 용인 지역에는 많은 정기 장시와 점막(店幕)이 등장했다. 1743년(영조 19) 간행된 『용인현읍지』에는 장시로 읍내장·금랑장 등 3곳과 행원점·첨천점·신점 등 11곳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양지현의 경우도 『경기지』에 개천장과 진촌점·해답점 등의 장시와 점막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물산의 대부분이 도성으로 집중되던 시기에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또한 용인 지역에 인구가 늘어나 다양한 소비층을 형성한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인구]
두 차례의 국난 이후 유민의 정착, 농업 생산력의 발달 등 정책적인 노력으로 전국적인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증가한 인구는 생계를 위해 도성이나 도성 인근의 경기 지역에 정착했다. 용인 지역도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 후기 인구가 크게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한정적이지만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용인현에 535명 양지현에 609명을 기록하고 있다.
실제 인구는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후 1871년(고종 8)에 간행된 『경기읍지』에는 용인현에 22,700여 명, 양지현에 4,0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록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용인 지역에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알 수 있다.
[교통과 통신]
신경준의 『도로고』에는 전국의 6대로를 기록하고 있다. 그 중 경도와 부산을 잇는 동남로상에 용인 지역이 있다.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역제가 발달해 있었다. 용인의 교통로는 영화도(迎華道)에서 관할했는데 구흥역(駒興驛)과 금령역(金嶺驛)이 있었다. 역과 함께 조선시대 교통로의 중요한 기능을 했던 기관으로 원(院)을 들 수 있다. 원은 일종의 여관으로, 일반적으로 공무에 이용되었다. 용인에는 보시원·홍화원·금령원 등 3개소가 있었다.
조선시대 주요한 통신 수단으로는 봉수와 파발이 있었다. 봉수제란 긴급한 군사상의 연락 사항을 중앙에 보고하는 제도로서 전국에 약 620여 개의 봉수대가 있다. 전국의 봉수는 동서 5개 노선을 통하여 서울의 목멱산으로 송신하였다. 이 중에서 용인의 보개산(寶蓋山)과 양지의 건지산 봉수는 제2노선의 직봉 40개 처의 한 곳이었다.
제2노선은 경상도 다대포의 옹봉을 시발점으로 경주·안동·예안·봉화·순흥·단양·음성·죽산 등을 거쳐 용인의 건지산으로 보고된 후 다시 도성으로 상황을 알렸다. 이로 보아 용인은 조선시대부터부터 중부 이남 지역과 도성을 연결시켜 주는 가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향촌사회]
용인은 도성과 가까운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많은 명문 가문들이 거주해 있었다. 고려 말 토성(土姓)으로 용인이씨, 15세기 용인 지역에 정착한 영일정씨와 연안이씨, 16세기에 정착한 한양조씨와 한산이씨, 17세기에 정착한 해주오씨, 우봉이씨 등이 있다. 용인이씨는 고려 말 가세가 일어나 조선 전기 훈구 계열로 가문의 위세를 떨쳤다. 이후 17세기 이세백·이의현 부자가 재상에 오르며 명문가를 이루었다.
또한 조선 중기 사림의 영수로 활동했던 조광조의 한양조씨는 15세기 중반 이 곳으로 이주해와 가세를 일으켰다. 당시 조광조가 용인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심지는 사은정(四隱亭)이었는데, 사은정은 1516년(중종 11) 조광보 등과 한산이씨인 이자가 조성한 곳이다. 이곳은 조광조 등이 학문을 강론하는 곳인 동시에 당시 사림 세력들의 집결지와 같은 기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