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517 |
---|---|
한자 | 倭寇-侵入 |
영어음역 | Waeguui Chimip |
영어의미역 | Invasion of Japanese Pirat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대중 |
[정의]
고려 말 왜구가 경기도 용인 인근에 침입한 사건.
[역사적 배경]
우리나라에서 왜구의 침략은 고려 말 약 40년간 제일 심했다. 왜구의 발생은 2차에 걸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일본 국내의 내란으로 몰락한 무사와 농민들이 노예와 미곡을 약탈하면서 생겨났다. 그들은 지방 호족들의 보호와 통제 아래 행동했으며, 근거지는 쓰시마[大馬島]·마쓰오라[松浦]·이키[壹岐] 등이었다.
[목적]
조운선이나 조창을 습격하여 양곡을 약탈하고 민가를 습격하여 인민을 노략질하는 것이 왜구들의 침략 목적이었다.
[경과]
왜구가 처음 침입한 것은 1223년(고종 10)이었으나 본격적으로는 1350년(충정왕 2)부터이었다. 이후 공민왕 때에는 동해·서해·남해의 연안뿐 아니라 내륙까지도 침범하였다.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은 곡창 지대였고, 조운선이 올라오는 길이었기 때문에 약탈이 더욱 심하였다.
경기도 역시 이에 못지않아 27곳을 65회에 걸쳐 침입당하였다. 이는 전국의 조세가 모두 집결되는 개경 앞의 강화도가 경기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왜구가 내륙으로도 진출하여 양광도를 침략하면 용인 사람들도 왜와의 전투에 동원되어야 했다. 때로는 개경 일대 수도권 방어에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우왕 대에 들어서면서 왜의 침략은 더욱 거세어져 고려 조정은 비상 사태에 들어갔다. 온 조정이 전시 체제로 들어갔다. 이때 판삼사사 최영은 6도도통사로서 6도의 병사를 관할하였으므로 용인 또한 최영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왜는 최영의 전력을 아래 지방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연이어 침략하였고 용인 인근의 평택·안성·수원 등도 공격을 받았으며, 오늘날 용인시 지역도 피해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1378년(우왕 4) 5월에는 수원·용인 지역에까지 공격을 받게 되자 최공철이 양광도도원수로 부임하였고, 휘하의 용인 호장 이부의 지휘하에 왜를 물리쳤다. 이후에도 양광도에 대한 침략은 계속되었으나 6월에 최무선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화포 공격에서 승리하여 양광도 내 용인 지역의 안전도 확보되었다.
왜는 1390년(공양왕 2) 6월에 음죽·음성·안성·죽주 등을 공격하였으니 오늘의 용인시 지역이 공격받았던 것이다. 이후 윤사덕과 이방과 등이 지금의 천안 도고산 아래에서 왜적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결과]
고려가 왜구 소탕을 위해 온갖 힘을 다 쏟아 부은 결과, 1376년(우왕 2) 최영의 홍산(鴻山)[지금의 논산] 대첩, 최무선 등의 진포 싸움, 이성계의 황산 대첩, 1380년 정지의 남해 대첩, 1389년(창왕 1) 박위의 대마도 정벌 등으로 왜구의 기세는 수그러들었고 특히 양광도가 속한 서해에서의 침탈 행위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또 해안 곳곳에 성을 쌓고 군사 제도를 정비되고 점차 수군의 힘이 강해지면서 용인 지역은 이전 상태로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