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6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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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千鎰 |
영어음역 | Kim Cheonil |
이칭/별칭 | 사중(士重),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문열(文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재광 |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의 금령 전투에서 승리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언양.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이다. 증조부는 김응복(金應福), 할아버지는 김식(金湜), 아버지는 김중기(金重器)이며, 외할아버지는 이용(李蓉), 부인은 박덕창(朴德昌)의 딸이다.
[활동사항]
1573년(선조 6)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되고, 1578년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나주에 있다가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선조가 피난 간 평안도를 향해 가다가, 왜적과 싸우면서 수원의 독산성(禿山城)을 점령하였고 용인의 금령(金嶺)[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일대] 전투에서 승리한 뒤 강화도로 들어갔다. 용인전투는 의병에게는 첫 번째 승리를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 공으로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창의사(倡義使)의 호를 받았다.
왜적에게 점령된 서울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싸우고, 한강변의 여러 적진을 급습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다음해 정월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군대가 개성을 향해 남진(南進)할 때, 그들을 도와 도로(道路)·지세(地勢) 및 적정(敵情) 등을 알려 작전을 도왔다.
또한 왜군이 남쪽으로 퇴각하자, 절도사 최경회 등과 함께 진주성(晋州城)을 사수(死守)하였다. 그 뒤 진주성을 지킬 때 백병전이 벌어져, 화살이 떨어지고 창검이 부러져 대나무 창으로 응전하였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남강(南江)에 투신자결하였다.
[학문과 사상]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삼장사(三壯士)의 한 사람이다.
[저술 및 작품]
『송천집(松川集)』·『건재집(健齋集)』이 있다
[묘소]
전라남도 나주시 삼영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고,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 등에 배향(配享)되었다. 전라남도 나주시 대호동 소재의 정렬사비는 기념물 제48호로 그를 추모하여, 그의 서거 34년 후인 1626년(인조 4) 나주 유림들이 그의 사우 정렬사에 세운 것이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