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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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第-次龍仁義兵 |
영어음역 | Je Ilcha Yongin Uibyeong |
영어의미역 | First Righteous Army of Yongi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도형 |
[정의]
1896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경기도 용인 지역에 일어났던 의병 항쟁.
[역사적 배경]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을 도발하면서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갑오개혁을 추진하면서 내정간섭을 감행하는 양면 전략으로 한국 침략을 강화하였다.
즉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침략을 강화하자 극동에 진출해 있던 러시아를 비롯한 독일·프랑스의 개입이 강화되었고, 일본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그러자 일본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을 실시하며 친일세력의 부상을 위해 온갖 노력을 강화하였다.
[목적]
1895년 10월, 국모가 시해되는 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전국적인 반일 분위기가 성숙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졌다. 그러자 이에 촉발되어 본격적인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긴박한 시국상황에서 항일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하게 되었다.
[발단]
경기도 이천에서 결성된 남한산성 의병이 경기도 의병부대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이천 의병은 단발령이 공포된 바로 다음날인 1895년 12월 31일 조직되었다. 서울에 있던 김하락(金河洛), 조성학(趙性學), 구연영(具然英), 김태원(金泰元), 신용희(申龍熙) 등의 우국지사들이 단발령에 격분,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의 기치 아래 이천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경과]
김하락이 의병 모집 활동을 벌이자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김하락 의병부대에 모여들었다. 김하락의 동료인 조성학은 광주에 들어가 별패진군관 김덕삼을 시켜 별패진포군 300여 명을 일으켜 김순상, 이준성 두 사람에게 통솔하게 하였고, 구연영은 양근, 지평으로 가서 군사 300여 명을 일으켰으며, 신용희는 음죽, 죽산으로 가서 화포군 300여 명을 일으켰다.
또한 포군으로 자원해 온 의병도 100여 명이었다. 이때에 의병으로 나선 사람들의 수가 벌떼처럼 많았고, 경기도 인근의 용인·안성·포천·시흥·수원·안산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에 합세하여 이천수창의소에 모여들었다.
용인 지역에서는 신용희의 권유에 의해 먼저 화포군이 중심이 되어 봉기하였다. 반일투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용인지역 민중들은 이천수창의소로 결집하였다. 이천수창의소는 경기지역 연합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용인의병은 그 안의 독자적 부대로서 활동하였다.
이천수창의소가 결성되었을 때, 병력의 규모는 약 2,000명 정도였다. 이천수창의소는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한 경기도 백현 전투, 이현 전투, 남한산성 전투 등을 수행하였다. 용인의병도 이 3개 지역 전투에 함께 참여하였다.
[결과]
이천수창의소는 1896년 3월 22일, 남한산성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한 후 와해되었다. 이때 김하락은 100여 명도 안 되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때 용인 의병도 해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용인 의병은 용인 지역보다는 경기도 연합부대인 이천수창의소에 연합하여 경기도 과천, 광주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남한산성 전투에서 패하면서 해산하게 되었지만 용인 의병이 전기 의병 최대의 전투인 남한산성 전투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녔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