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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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奉化琴氏 |
영어음역 | Bonghwa Geumssi |
영어의미역 | Bonghwa Geum Clan |
이칭/별칭 | 봉성금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 |
집필자 | 김장환 |
세거지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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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시기/연도 | 조선 선조[임진왜란] |
성씨시조 | 금용식(琴容式) |
입향시조 | 금사룡(琴士龍) |
[정의]
금용식을 시조로 하고 금사룡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용인시 세거 성씨.
[연원]
봉화(奉化)는 경상북도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금씨(琴氏)의 본관은 봉화 외에도 계양(桂陽)·강화(江華)·안동(安東)·평해(平海)·문화(文化) 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가 봉화금씨의 분파이다.
봉화의 옛 이름이 봉성(鳳城)인 까닭에 봉성금씨라고도 하였으나 현재는 봉화금씨로 일원화되었다. 시조는 기자와 함께 우리나라에 온 금응(琴應)의 후손으로 고려 초의 삼한공신인 태사 금용식(琴容式)이라고 한다.
그러나 금응으로부터 금용식까지의 계보를 추적할 수 없고 또 금용식 이후로도 6세 내지 8세의 세계가 실전되어 금의(琴儀)를 1세조로 하고 있다. 금의는 금씨 성을 쓰는 인물 중 우리나라 역사와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물이다. 중시조 금의의 묘소는 김포의 봉황산(鳳凰山)에 있으며 1727년 봉화의 하눌재(下訥齋)에 단을 모아 향사하고 있다.
[입향경위]
봉화금씨는 경상북도 일대 및 충청북도 옥천, 전라남도 담양과 영암, 경기도 용인과 강화에서 세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봉화금씨 『계해보(癸亥譜)』에 의하면 윗대는 실전되어 추적할 수 없고, 10세 금우공(琴遇工)의 대를 전후해서 봉화군 상운면 일원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 가운데 13세 금미(琴美)의 후손은 충북 옥천군으로 옮겨가 살았다.
일부는 16세 금집(琴輯)의 대 이후로 전라북도 김제, 경상남도 산청,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 분파하여 세거하고 있으며, 14세 금원팽(琴元彭)의 대에는 안동군 풍산읍에 터를 잡았고, 17세 금사룡(琴士龍)이 벼슬을 그만두고 약 350년 전 지금의 화성시 동탄면 석우리에 내려왔다가 조선조의 잦은 전란 중에 피난골로 불리는 이곳 신고매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황]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 신고매마을에 모여 사는 봉화금씨는 10여 년 전만 해도 20여 호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이 떠나면서 현재 10호 정도 남았다. 이들은 봉화금씨 5개파 중 동래공파(東萊公派)로 금사룡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