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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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烈書院講堂記 |
영어음역 | Chungnyeol Seowon Gangdanggi |
영어의미역 | The Record of Lecture Hall of Chungnyeol Confucian Academy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순석 |
성격 | 기문(記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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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정구(李廷亀)[1564~1635] |
창작연도/발표연도 | 1608년(선조 41) |
[정의]
1608년(선조 41) 이정구가 충렬서원에 내린 사액을 기록한 기문.
[개설]
「충렬서원 강당기(忠烈書院 講堂記)」는 충렬서원 강당에 현판으로 걸린 기문(記文)으로, 충렬서원에 사액(賜額)이 내리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이정구(李廷亀)[1564~1635]가 지은 기문이다. 이정구의 문집인 『월사집(月沙集)』에도 전한다. 충렬서원은 고려 말기의 문신 정몽주(鄭夢周)[1337~1392]를 배향한 서원으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있다.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 복원되었다.
[내용]
충렬서원을 건립하여 사액이 하사되기까지의 전말을 기록한 기문으로, 선조 임금이 포은 선생을 추숭하였을 뿐아니라, 후손들까지도 각별히 예우하였음을 열거하고 있다.
"선생의 서원이 송도에 있는 까닭은 고택이기 때문이고, 오천에 있는 까닭은 관향이기 때문이며, 임고에 있는 까닭은 구거이기 때문인데, 묘소 아래에만 없었다. 병자년(1576)에 여러 선비가 의논하여 죽전에 서원을 세우고 정암 선생을 배향하였으니, 이 땅이 두 선생의 묘도 중간에 있기 때문이며, 우리 선군과 사인 이지가 실로 이것을 주장한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임진년의 병화를 입어 폐허가 되었으므로 사림이 애석하게 여겼다.……(중략)……
무신년(1608) 10월에 신위를 봉안하고 그해 겨울에 이시윤 등이 상소하여 편액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특별히 어제를 내리어 충렬서원이라 하였으니, 또한 특이한 은수이다.……(중략)……
아아! 큰 옥사가 바야흐로 벌어졌을 때에 공이 홀로 항거하는 말을 하여 사실을 토로하였으나 우리 광묘께서 특별히 선생 때문에 용서하셨고, 국장에 터를 잡지 못하여 모든 산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우리 선왕께서 특별히 분부가 계셨으며, 여러 선현의 서원에서 편액을 청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우리 성상께서 선생의 서원에만 어제로 편액을 내리셨으니, 열성께서 승장하시는 덕은 전후에 방도가 한가지였다.
아아! 지극하시다. 수백 년 이래로 북돋우어 세우는 은전을 극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이 두어 가지 일은 성대한 일인데, 적어서 밝혀 둔 데가 없어서 모르는 사람들도 있으므로 내가 이제 주청사로서 중국에 사신 갔다가 돌아와 사당 아래에서 배례하고, 오래 갈수록 더욱 모르게 될 것을 염려하여 등불을 가져오게 하고 입으로 불러 써서 유생들에게 주어 영세토록 전하게 하며, 아울러 서원의 전말을 위와 같이 적은 것이다."
[의의와 평가]
충렬서원의 건립 과정부터 사액되기까지의 경위뿐만 아니라, 충렬서원의 구체적인 규모와 열성조들이 각별히 포은 선생의 후손들에게까지 은전을 베풀었음을 살필 수 있다. 충렬서원이 기호 사림의 터전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기록은 충렬서원의 전말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