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736 |
---|---|
한자 | 生居鎭川死居龍仁 |
영어음역 | Saenggeo Jincheon Sageo Yongin |
영어의미역 | Jincheon When Alive and Yongin After Death |
이칭/별칭 | 「내 영혼 남의 육신」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집필자 | 정혜경 |
성격 | 전설|유래담 |
---|---|
주요 등장인물 | 용인사람|진천사람 |
관련지명 | 용인|진천|묘봉리 |
모티프 유형 | 접신(接神)|명판결 |
[정의]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다른 사람 몸으로 환생한 사람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생거진천 사거용인」은 용인의 대표적인 설화로 세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용인사람이 죽어 진천사람에게 접신하여 진천에 살다 죽은 유형, 두 번째는 용인 남편이 죽자 진천사람에게 재혼하여 진천에 살다 죽은 유형, 세 번째는 용인사람이 죽어 진천사람에게 접신하여 용인에 살다 죽은 유형이 그것이다. 『용인군지』에 실려 있는 「생거진천 사거용인」은 두 편으로 각각 1939년과 1972년에 채록되었는데, 두 본의 내용은 차이가 있다. 1939년에 채록된 이야기가 첫 번째 유형이라면, 후자는 두 번째 유형에 해당한다.
이후 첫 번째 유형의 이야기는 1983년과 2004년에 또 한 번 채록되었으며, 각각 『한국구비문학대계』1-9와 『경기민속지』에 실려 있다. 두 번째 유형의 이야기는 1995년에 세 번, 2004년에 한 번 채록되었으며, 『중부지역의 구비전승』과 『경기민속지』에 수록되어 있다. 세 번째 유형의 이야기는 1995년에 채록되어 『용인 중부지역의 구비전승』에 실려 있다. 이밖에 1980년에 「내 영혼 남의 육신」이라는 이칭으로 채록되어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수록되어 전한다.
[내용]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 용인군 이동면 묘봉리에 한 사람이 살았다. 부모도 친척도 없는 사람으로 남의 머슴살이를 하였으나 워낙에 정직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이 삼십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간 총각이 안타까워 그와 처지가 비슷한 여자와 혼례를 치러 주었다.
부부는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부인은 매일 남편을 위해 십 리나 떨어진 산골짜기로 점심을 갖다 주었다. 남편이 점심을 먹는 동안 아내는 고생하는 남편을 돕기 위해 화전을 일궜다. 그 사이 피곤한 남편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산 밑으로 돌이 굴러떨어졌다. 놀란 아내는 서둘러 산 아래로 내려갔지만, 이미 남편은 돌에 치어 죽은 뒤였다. 아내는 대성통곡하며 “우리 남편을 살려 달라.”고 울었다. 이 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수천 근이나 되는 돌을 치울 수가 없어 돌 밑에 남편을 묻었다.
죽은 남편은 저승에 갔다. 저승의 최참판이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자 아무개 몇살이라 했더니, “너는 아직 죽을 때가 안 됐다. 그러니 다시 내려가 살아라.” 하였다. 그리하여 명령을 받고 내려왔으나 시신이 큰 바윗돌에 치어 죽어 있으므로 접신할 수가 없었다. 용인사람은 할 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충청북도에 있는 진천의 오백 석 부잣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그 집 아들이 사십이 안 돼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자, 그 집 어머니가 혹시나 아들이 살아날까 하는 마음에 일주일이 되도록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있었다.
접신을 못하고 있던 용인사람은 죽은 진천사람의 신체에 가서 접신하여 살아났다. 살아난 용인사람은 매일같이, “용인군 이동면 묘봉리에 내 처가 몇 살이고, 아무 아무 해에 장가를 들었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 어머니가 인마를 거느리고 묘봉리를 찾아갔더니, 그곳에 소복을 입은 여자가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부인에게 물을 한 바가지 떠달라고 하여 마신 후, 우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실 저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이 집에 시집왔는데 불과 일 년도 안 돼서 남편이 죽었습니다. 믿고 살 사람이 없어 이렇게 매일같이 웁니다.” 이 말을 들은 진천 어머니는, “그러면 당신은 내 며느리요. 당신 남편이 저승에 갔다가 우리 아들한테 접신을 했으니 우리 집으로 같이 갑시다.” 하고는 가마에 태워 진천으로 데리고 갔다. 진천에 도착해 보니, 남편의 얼굴은 다르지만 음성은 틀림없이 같았다.
이렇게 해서 용인사람은 진천사람이 되어 진천부인과 용인부인을 데리고 살게 되었다. 진천 본부인에게 두 아들을 낳고 용인부인에게서는 세 아들을 낳고 칠팔십 년을 살다가 죽었다. 아버지가 죽자 진천아들과 용인아들 사이에 아버지의 혼백을 서로 모시겠다고 분쟁이 일어났다. 결국 명관으로 이름난 진천군수한테 가서 송사를 하게 되었다.
“살아서는 어디서 살았느냐?”고 진천군수가 물어 보자 아들들은 한 목소리로 “진천서 살았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진천군수는, “그래? 그럼 생거진천했으니 사거용인해라.” 하였다. 살았을 때는 진천에서 살았으니 죽어서는 용인에 살라는 판결이었다. 그래서 혼백을 용인아들이 모시게 되었다. 이로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나왔다.
[모티프 분석]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살아서는 진천에 살았으니 죽어서는 용인에 살라는 뜻이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에서는 이렇듯 명관의 지혜가 돋보인다. 이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유형 가운데 첫번째 유형으로, 명관은 살아서 진천에 살았으니 죽어서는 용인에 살라는 객관적 판결을 내린다. 반면 용인 남편이 죽자 진천사람에게 재혼하여 진천에 살다 죽은 유형과 용인사람이 죽어 진천사람에게 접신하여 용인에 살다 죽은 유형의 이야기에서는 판관이 “죽어서는 용인 땅에 묻히는 것이 좋다.”는 말을 남긴다. 즉 사후 용인이 명당으로서 탁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 이야기가 다양한 변이형태를 가지며 용인 지역의 대표 설화로 정착된 데에는, 용인의 자연환경이 수려하고 풍수적으로 명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지역적 자부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