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8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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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負兒山-覓祖峴 |
영어음역 | Buasangwa Myeokjo-hyeon |
영어의미역 | Buasan mountain and Myeokjo-hye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
집필자 | 정혜경 |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서 부아산과 멱조현에 관한 지명 유래담.
[개설]
부아산은 용인시 삼가동에서 화성시 동탄과 용인시 기흥읍을 잇는 비교적 높은 산이다. 산의 형세가 아이를 업은 것과 흡사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부아산의 부(負)를 부자 부(富)로 해석하여 부자 아이를 업은 산이라고도 한다. 멱조현은 삼가리에서 어정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메주고개라고도 불린다.
[채록/수집상황]
1978년에 채록되어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실려 있다. 1995년에 출간된 『용인 중부지역의 구비전승』에도 부아산의 유래와 관련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현재 부아산 자락에는 유도대학이 들어서 있는데, 구연자는 이야기 서두에 유도가 아이를 등에 지는 것이기 때문에 지명전설과 적합하다고 하였다. 이는 부아산의 지명전설이 굴절된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내용]
홀로 된 시아버지를 모시고 외아들을 키우며 사는 한 부부가 있었다. 이들 부부는 가난하지만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부친을 잘 봉양하였다. 할아버지 역시 손주를 끔찍이 아껴 항상 집안에 화기가 돌았다. 어느 해, 남편이 관가에서 시키는 부역 때문에 여러 날 집을 비우게 되었다. 남편이 없는 동안에도 부인은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고, 시아버지는 아들 대신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돌아올 때쯤이면 항상 아이를 업고 고갯마루에서 시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밤이 깊어가고 있는데도 시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를 업은 며느리는 조금 더 조금 더 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가다가 자신도 모르는 길을 헤매게 되었다. 얼마나 헤맸을까,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며느리는 혹시나 시아버지가 짐승에게 해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그곳으로 달려갔다. 과연 그곳에서는 시아버지와 호랑이가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부인은 호랑이를 크게 꾸짖으며, “네가 정말 배가 고파서 그런다면 내 등에 업힌 아이라도 줄 테니 우리 시아버님은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어린아이를 호랑이 앞에 주자, 호랑이는 아이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시아버지는 손자를 잃은 슬픔에 오열을 금하지 못했으나 며느리의 간곡한 애원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시아버지가 낙담하며, “나는 이미 늙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을 텐데, 어째서 어린아이를 죽게 했느냐?” 하였더니 며느리는, “어린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지만 부모는 어찌 다시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며 마음 상하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였다. 시아버지도 며느리가 더욱 마음 아파할까 봐 겉으로는 슬픈 척도 하지 않았다. 그후 사람들은 부인이 아이를 업고 헤맨 산이라고 하여 부아산이라고 부르고, 어린아이의 할아버지를 찾던 고개라고 하여 멱조현이라고 이름붙였다. 멱조현은 또 메주고개로도 전해지고 있다.
[모티프 분석]
「부아산과 멱조현」의 기본 모티프는 ‘호랑이에게 아들을 던져 준 며느리’이다. 『용인군지』에 실린 「효부 이야기」(2)와 유사한 형태의 이야기로 「효부 이야기」(2)에서는 아이를 데려간 대상이 호랑이에서 늑대로 변이되어 있으며, 외출한 남편이 돌아와 아이의 행방을 묻는 장면이 추가되어 있다.
「부아산과 멱조현」은 효행담이면서 부아산과 멱조현의 지명유래담이기도 하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서는 부아산을 가리켜, “현 남쪽 20리에 부아산이 있다. 봉우리 위에 또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사람이 아이를 업은 형상과 같아서 이름 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아산과 멱조현」의 내용과 산의 형세가 일치한 것으로 보아 호랑이에게 아들을 던져 준 며느리 모티프가 용인의 특정 지역과 결합하면서 설화로 변모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