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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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積-窟- |
영어음역 | Heojeogigure Eolkin Iyagi |
영어의미역 | A Tale of Heojeogigul Cav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가창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효림 |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가창리에 허적이굴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1981년 10월 9일 백암면 가창리에서 임국재가 구연한 것을 채록하여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수록하였다.
[내용]
조선 후기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허적은 당시 충청도의 외사면이었던 가창리 지경에서 출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허적이 가창리 근방에 있는 수정산 암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암자 뒤의 바위굴 앞에서 주지가 메를 지어 치성을 드리더니 20여 마리의 산 닭을 굴 속으로 던졌다.
허적이 생각해 보니, 공양 메를 올리는 것은 부처 앞이거나 아니면 산신각에서 할 일이거늘, 그도 저도 아닌 바위굴 앞에서 주지가 공양 메를 올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괴이한 일이 분명하였다. 후에 허적 선생은 주지를 만나서, 무슨 제를 드리기에 산 닭을 굴 속으로 들이면서 공양 메를 올리는지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주지는, 바위굴 속에는 아주 큰 구렁이가 살고 있는데, 초하루와 보름으로 생닭 공양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절을 해치려고 하므로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그간의 내력을 털어놓았다.
의협심이 강했던 허적은, 미물에게 어찌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분개하며, 반드시 그놈을 해치우겠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지가 손을 저으면서 부잣집 대들보와 같은 크기의 구렁이를 어찌 처치할 수 있겠느냐며 만류하였으나 허적은 염려 말라면서, 스님은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다음 삭망 때 공양 올릴 준비나 하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산 닭을 공양하는 날이 되었다. 허적은 법당의 널따란 귀틀마루 송판을 하나 걸러 하나씩 여러 개를 뽑아 놓았다. 그리고 환도를 날이 시퍼렇게 갈아놓은 다음 절차대로 메를 짓고 산 닭을 굴 앞에 가져다 놓고 목탁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 같은 것이 잠시 들리는가 싶더니, 어머어마하게 큰 구렁이가 산 닭을 먹으려고 굴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이를 보자 허적은 산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호령을 하였다.
“너와 같은 미물이 어찌 불가에서 수도하는 승려들을 괴롭힌단 말이냐? 오늘 이 어른께서 너의 방자하고 요망스런 작태를 단죄하리라.” 그러고는 구렁이가 막 삼키려던 닭을 빼앗아 동댕이쳐 버렸다. 그러자 성이 난 구렁이가 허적을 쫓아나오는데 그 소리가 마치 소나기 퍼붓듯 괴이하였다. 허적은 비호같이 몸을 날려 법당 마루로 들어갔다가 미리 빼어 놓은 귀틀마루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허적은 그렇게 구렁이가 마루 밑으로 들어왔다가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 즈음 다시 건너 구멍으로 들어가고, 또 다음 구멍으로 빠져나오고 하여서 성난 구렁이가 쫓아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들쑥날쑥 도망 다니는 동안 구렁이는 마루 구멍 안팎으로 꼬인 형국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허적은 예리한 환도를 빼어들고 구렁이를 토막쳐서 마침내 우환거리를 깨끗이 퇴치해 버렸다. 그런데 순간 구렁이 몸체에서 붉은 피와 함께 이상한 서기가 뻗치더니 허적이 사는 마을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어제의 일을 모두 잊은 채 허적이 공부에 몰두하고 있는데 집에서 종자 하나가 내달아 오더니, 별채 소실께서 밤사이 급환으로 기동을 못한다고 하였다. 급히 집에 당도하여 보니 과연 소실은 전신이 마비되어 움직이지를 못했다. 허적이 측은하고 안타까워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며 소실의 손을 어루만지니, 기이하게도 손길이 닿자마자 평시와 같이 몸이 회복되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이삼 일 함께 묵으면서 격조했던 부부의 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입산하여 과거 공부에 전념하는 동안 어언 열 삭이 되었을 때 옥동자를 분만하였다는 전갈이 왔다. 어찌나 잘생겼던지 보는 사람마다 관옥 같고 옥골 선동 같다는 소문이 원근 향리에 자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적의 형인 미수 허목이 와서 아이를 보더니 아우를 불러서는, 이 아이를 당장 없애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허적은 무슨 연고로 혈육을 저버려야 하느냐며 물었지만 끝내는 형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형님이야말로 세상에서 일컬어 이인(異人)이라 하는 분으로, 동해바다 영해에 퇴조비(退潮碑)를 세워 조수(潮水)를 물리친 비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 이후 한 해가 지나 소실은 전보다도 더 영특하고 잘생긴 옥골선동을 얻게 되었다. 먼젓번 버린 자식을 늘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던 허적이었으므로 그의 기쁨은 뛰고도 남을 만하였다. 그런데 이를 본 형이 역시 전과 똑같이 이 아이마저 없애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우 허적은 엎드려 목을 놓았다. “이제 후일 어떤 화를 당할지라도 이애는 버리지 못하옵니다.”고 하자 허목은 길게 탄식을 하면서, “어찌하랴, 자네가 그럴 결심이라면 형제의 연을 끊을 수밖에 없네.” 하면서 족보의 문적을 분리하였다.
옥동자는 그후 무럭무럭 자라 일취월장 원숙해지고 글 배우는 재주가 뛰어나 원근에서 부러워하는 헌헌장부가 되어 교서정자(校書正字)를 지냈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이 된 부친 허적의 세력을 믿고 방자함이 심하여 유부녀 이차옥(李次玉)을 강탈하는가 하면, 청풍부원군의 첩과 싸워 이를 부러뜨리는 횡포를 저질러 좌윤 남구만의 상소로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급기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련되어 1680년(숙종 6)에 처형되고 말았다. 그가 바로 허견(許堅)으로, 허적 역시 그 당시 아들로 인해 죽음을 당하였다. 그후 사람들은 핏덩어리를 보고 장래를 내다보았던 허목의 형안을 놀라워하면서 구렁이가 나왔다는 수정산의 굴을 허적이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허적이굴에 얽힌 이야기」는 백암면 가창리의 수정산에 있던 정원사 암자 뒤 바위 밑 굴을 허적이 굴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가 깃든 지명유래담이다. 부잣집 대들보만한 구렁이를 없앤 뒤 낳게 되었다는 허견과, 허견의 미래를 내다보고 집안의 몰락을 막기 위해 문적을 정리하는 이인 허목 등의 행적이 허적이굴이라는 증거물을 앞세워 신비감과 현실감을 동시에 부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