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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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厚載神道碑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for Sin Huja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길경택 |
성격 | 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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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48년 |
관련인물 | 신후재 |
재질 | 화강암 |
높이 | 175㎝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우리 |
[정의]
1948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우리에 건립된 조선 중기 문신 신후재의 신도비.
[개설]
신후재(申厚載)는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호는 규정(葵亭) 또는 서암(恕庵)이고, 자는 덕부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가 부교리를 지냈고,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제거될 때 삭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사은겸진주주청부사(謝恩兼陳奏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강화부유수, 개성부유수,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1694년(숙종 20)에 갑술옥사로 남인이 실각했을 때 경기도 여주로 귀양 갔다가 3년 후 풀려나 오궁리 오갑으로 낙향한 뒤 학문에만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다.
[형태]
신후재 신도비는 일반적인 비의 형태로, 화강암으로 만든 방형 지대석 위에 작고 두터운 방형 대석을 놓고, 그 위에 비신을 올린 모습이다. 전자(篆字)로 비명을 우횡서(右橫書)하고, 비문은 해서체로 우종서(右縱書)하였다. 비신의 위에는 가첨석을 올려놓았다.
[금석문]
비 앞면에 ‘자헌대부한성부판윤신공신도비명(自憲大夫漢城府判尹申公神道碑銘)’라고 비제가 쓰여 있다. 비문은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낸 연안(延安) 이병관(李炳觀)이 짓고, 여주군수를 지낸 연안 이병렬(李炳烈)이 글씨를 썼다. 전서체로 쓴 비제는 신후재의 11세손인 신동일(申東日)이 쓴 것으로, 신도비는 신후재 사후 248년이 지난 1948년에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