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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1050
한자 申貞淑
영어음역 Sin Jeongsuk
이칭/별칭 신봉빈(申鳳彬)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박종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평안북도 의주
성별
생년 1910년연표보기
몰년 1997년연표보기
대표경력 한국독립당 제8구당 집행위원

[정의]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1910년 5월 12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7천 석 지기 갑부로 독립운동을 하던 신조준의 딸로 출생하였으며, 선천보성여학교 2학년 때 권고퇴학을 당하고 교회 어른들의 주선으로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장현근과 19세에 결혼하였다.

결혼 1주일 만에 남편이 사라져 수소문 끝에 여운형의 소개를 받고 신의주에서 만주로 가려다가 안창호와 남편 장현근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1932년 6월 7일 서울로 돌아와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안창호장현근을 모른다고 극구 부인하여 집행유예로 풀렸으나 그 후 남편은 종적을 감췄다.

4년이나 걸려 어렵게 임시정부에 찾아갔다가 광복군에 가담하게 되었으며, 신봉빈(申鳳彬)이란 가명으로 활동하였다. 귀주성 계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있으면서 주소도 모르는 김구에게 계속 편지를 한 덕분에 김구를 만나 임시정부 주석실에서 근무하였다.

김구의 개인 비서로 있다가, 중국군 특별간부 훈련단 제6분단 한국인 반에 지원 입대하여 1년 반을 훈련받고, 1941년 4월 29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로부터 김문호, 이지일, 한도명과 함께 중국 중앙군 제3전구사령부에서 유격작전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식명칭은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초모위원겸 회계조장이었다.

한국독립당 제8구당 집행위원을 맡으며 정보수집, 대적방송공작, 선전활동 등을 하며 전투 공작대원으로 용맹스럽게 투쟁을 하였으므로 중국에서도 화재를 일으켰으며, 1942년 장개석은 “한 명의 한국 여인이 1천 명의 중국 장병보다 더 우수하다”고 극찬하였다. 1942년 10월 광복군 제2지대 3구대 3분대에 편성된 이후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활동하였으며, 1946년 3월에 부산을 통해 입국하여 아들과 경교장에서 머물렀다.

백범 김구가 서거한 이후 생계를 위하여 양계업도 하고 돼지도 기르고, 봉투 등을 붙이는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김구의 아들 김신이 대신 진정서를 제출하여 건국포장을 받고, 보상금으로 생활이 어려운 소년소녀들을 키우는 데 사용하는 등 남은 생을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지냈다.

[상훈과 추모]

1972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77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1997년 향년 88세에 별세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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