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A020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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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경수, 박종호 |
갑산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할아버지들게 예전의 혼인 풍습에 대해서 여쭤 보았다. 할아버지들은 혼인을 했던 이야기가 아주 오래 전 이야기인 만큼 잘 생각도 안나고 쑥스럽다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시골에서는 혼인은 동네잔치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혼례를 하기 전, 갑산리는 주로 가깝게는 괴산군에서 시집을 오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중매로 결혼을 하였냐고 여쭤보니, 중매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얼굴을 모르는 상태로 혼인을 하였다고 한다. 신랑감이 정해지면 신랑도 모르는 사이 신랑의 가문, 학식, 인품 등을 조사하기 위해 신부 집에서 왔다 가는데 할아버지들은 20대도 안 된 나이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을 보러 왔다가는 것도 모르기 일쑤였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요즘 말하면 ‘선을 본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양가의 부모님이 길일을 택하여 혼사 날이 정해지면 전날 신랑 집에서 함을 보낸다고 한다. 요즘과 같이 함을 보내는 것이 신기하여 그 때도 신랑 친구가 오징어 가면을 쓰고 함을 운반했는지 여쭤 보았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런 풍습은 없었다며 지금은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 하는 모습이었다.
예전의 함에는 신부가 치마, 저고리를 해 입을 수 있도록 옷감을 넣고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비단 같은 옷감을 넣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함 안에 예물을 넣거나 하지는 못했다고 말해 주었다.
혼례는 신랑 집에서 하기도 하고 신부 집에서 하기도 하였는데, 갑산리에서 들은 바로는 신부가 가마를 타고 신랑 집으로 오면 혼례가 시작되는 것이라 한다. 이 때, 신부가 탄 가마를 메는 사람들도 아무나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가마를 메는 사람은 앞에 한 사람 뒤에 한 사람 해서 두 명을 주로 세웠는데 동네 연방계원 들 중 힘이 세고 부정한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골라서 썼다고 한다. 좀 더 옛날에는 반상의 법도가 존재했기 때문에 주로 상놈이 가마를 맸었는데, 해방 이후 연방계가 조직되면서 그러한 법이 사라졌다고 한다.
정자안 정기용 할아버지(74세)가 혼인 하는 날 먹는 음식 등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혼인을 치루는 날 주로 차리는 음식은 밤, 대추 등을 올려놓고 주 음식은 국수라고 한다. 요즘에도 결혼을 하는 것을 “국수 먹는 날”이라고 말하는 데, 이는 옛날부터 내려온 풍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혼인할 때 입는 옷으로는 여자는 가장 큰 특징이 족두리를 쓰고 한복을 입는 것이고, 남자들은 사모관대를 한다고 표현을 한다. 남자들은 특히 모자를 쓰는데, 화려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모자를 씀으로 해서 혼인 의상의 멋을 부렸던 것이다. 혼인 상에 올리는 흰떡에는 청실과 홍실을 감아 놓았다고 한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깨끗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닭을 날리는데 닭은 봉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암탉과 수탉 역시 깨끗하게 오래오래 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게 잘 하는 유재연 할머니(77세)가 해준 시집올 때 이야기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혼인을 하고 난 뒤 친정집에서 부모님이 써 주신 편지를 후계손이 전해주러 신혼집에 온다고 한다. 후계손(친정아버지, 오빠 등)이 따라와서 혼례를 다 치르는 것을 보고 신부가 살 방에 들어가서 구경을 한 뒤 문안편지를 읽어주면 혼례를 구경하던 사람들이나 신부가 슬퍼서 울었다고 한다.
결혼 후, 아들을 낳는 방법으로는 노름꾼이 노름하고 새벽에 들어오듯이 새벽에 들어와서 합방을 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동네에 산신당이 있어서 아들을 낳기 등을 기원하곤 하였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그 산신당이 공비의 은신처가 된다고 하여 모두 없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