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E02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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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영숙, 조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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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짓 다해서 재산을 불리다
남편은 제대 후 농사를 지었는데 남의집살이를 하며 1년에 7가마를 지으며 어렵게 시작했다. 남편은 품 팔고 자신은 방공일, 공공일에 식당에서 품 팔고, 그렇게 모아서 소도 사고 땅도 샀다.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 덕 하나 안보고 자수성가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3일을 일하면 쌀 한 말을 주었지만 여자는 5일을 일해야지 주었다. 그렇게 바쁘게 일하느라 아이들 데리고 놀 시간도 없었다. 젖만 떨어지면 자기들끼리 놀게 하고 품값 500원을 벌러 갔다. 그래서 자녀들은 엄마가 어디를 다녀오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고, 사탕을 사다줘야만 쳐다볼 정도로 그렇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배고프게 키웠다.
“때꺼리가 없어서 사흘을 굶겨서 애를 학교 보냈어, 우리 큰애를. 하루 품값을 얻어다놓고 밥을 해놓고선, 저녁도 굶었지 아침도 굶었지, 요 앞에 학교를 보낸 겨 국민학교. 이놈의 애가 와야 밥을 먹지. 어른은 참아도 되잖아, 일곱 여덟 살 먹은 게 학교를 갔는데 밥이 들어가? 이걸 올 때를 바라니 저녁 해가 오더라고. 큰애가, 지금 쉰둘 먹은 놈이, 오는데 여기 쉬나무꼴에 오더라고. 오는데 내가 쫓아나갔어. 불쌍해서, ‘에휴 배가 고파서 어떻게 걸어 갔다오냐’, 하니 ‘엄마 그래도 괜찮아. 쉬었다 오고 쉬었다 오고’ 그랬댜 여기 올라오는데.”
당시에 남편이 먹지도 못할 만큼 아파서 일을 쉬고 있었기 때문에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웃집에 빚을 지으려고 했는데, 빚도 어느 정도 있어야 질 수 있었기 때문에 쌀을 빌리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우리집 이가 아팠어. 먹지를 못해서, 뭐에 체했는지 어쨌는지 먹지를 못해유. 그때 당시에 성규어머니한테 쌀 닷 말을 빚을 달라니깐 안줘. 그랬어 내가. 내가 세상없이 어렵게 살아도 형님돈은 갚을 것이니께, 빚을 달라고. 우리집 이가 아파서 그거 한 말 퍼가지고 절에 갔잖아 신천리 절에. 거기 가서 굿하고. 별 짓을 다 했어유. 그랬더니 진천에 우리 이모가 사는데, 시집 이모가. 옛날에 미역도 귀했어. 미역도 사다 태워서 해서 먹으면 좋다는 소리를 듣고서, 장호원장에 사러 간다고 가더니, 진천 가는 차가 있더랴. 그래서 ‘이모가 보고 와서 죽어야겠다’ 해서 그 차를 잡아 탔댜. 우리 큰애들 둘 낳았을 때. 하루가 되도 안 들어와, 이틀이 되도 안 들어와. 알려나주면 가면 내가 편하잖아. 어디가 꼭 죽은 것만 같아서, 환장을 하는 겨. 하루 이틀, 남의 일 해주고 밥 한 사발 주면은, 품값이 어딨어 일해주면 밥 한 사발 줘. 그거 갖다 애들 먹이고. 이모가 교회를 다니는데 목욕을 하고 약을 지어다 먹이니깐, 세 첩을 지었는데 한 첩을 먹으니깐 대반 밥을 먹더랴. 일해주고 우리 큰애하고 둘을 밥을 얻어 먹이고 있는데, ‘아무개 아버지 왔어, 가봐.’ 그래서 인제 애들은 거기 먹으라고 두고 뛰어와서 보니깐, 깨끗하게 하고 와서 내다보고 앉아 있더라고. 그 전에는 녹두즙을 쒀줘도 안 먹었어요. 절에 가서 빌어서 곤은 다 태워났지, 부정된 거는. 모르지 뭐가 부정이 들었는지. 옛날에는 사람 죽은데 가도 상문살이 붙어 오면 풀어내야지만 낳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