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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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鄕校儒籍屠割事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5[구동 22-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수경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660년 - 광주향교 유적도할 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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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광주향교 -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5[구동 22-3] |
[정의]
1660년 광주향교(光州鄕校)의 유안(儒案)에서 56명의 명단을 삭제한 사건.
[개설]
광주향교 유적도할 사건은 1660년(현종 1) 누군가가 광주향교에 보관된 유안에서 유생 56명의 명단을 삭제한 사건이다. 유안을 훼손한 사람이 누구인지, 사건 후 처리 과정에서의 광주향교 내 갈등 상황이 어떠하였는지 등에 관해서 알 수 없다.
[역사적 배경]
조선 후기 새로운 향촌세력이 등장하여 기존 양반 사족들의 주도권에 도전하였다. 이들 세력들은 지방 사족들의 향권장악의 중요기구로 이용되고 있었던 향청의 직임을 차지하거나 지방 양반들의 권위나 그 지위를 인정해 주는 역할을 하는 향안 등에도 자신들의 이름을 올리고자 노력하였다. 새로이 대두한 향촌세력은 흔히 '신향', 기존세력은 '구향'이라고 불렸는데, 향촌에서의 지배권 및 주도권을 놓고 이들 사이에 빚어지는 여러가지 갈등 및 대립 양상을 '향전'이라고 한다.
[경과]
광주향교 유적도할 사건 이후 기존세력과 신흥세력 간의 대립이 불가피해졌고, 기존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여러 가지로 마련하였다. 남원읍지인 『용성지』에 기록된 "광주를 제외한 전라도 내의 3대읍, 즉 전주, 나주, 영암에서는 향론이 분열되고 향적(鄕籍)이 훼손되는 등 마치 한 고을이 전장과도 같았다."라는 내용으로 볼 때, 전라도 광주만이 향론이 일치한 지역이라고 언급한 것과는 달리 광주향교 유적도할 사건은 1660년대 전라도 광주의 신향과 구향의 대립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신향세력이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펼친 노력과 구향세력이 이에 대응하여 펼친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사건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