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6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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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山李氏 |
영어공식명칭 | Gwangsan Le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호 |
본관 | 광산 - 광주광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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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만산동네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
성씨 시조 | 이순백|이숙백 |
[정의]
이순백과 이숙백을 시조로 하는 광주광역시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광주 토성으로 기재된 14성 중 한 성씨이다. 광산이씨 집안에서는 광주 세거 자손들이 중심에 서서 이순백(李筍白)[상서공], 이숙백(李淑白)[한림공], 이승백(李升白)[제학공]의 3형제를 기일세(起一世) 할아버지로 세계를 이어왔다. 셋째 집 이승백계는 7세 이후 개성을 중심으로 살았으나 불분명하고, 한림공파와 상서공파 후손들이 현존하고 있다. 한림공파는 주로 광주, 전남 지역에 많고, 상서공파는 영남 지역에 많이 산다. 1854년에야 영호남 종중이 모여 파보를 한데 모아 대동보[丙申譜]를 만들었다. 1888년 사문중 중심의 파보를 만들면서 시조를 이종금(李宗金)으로 내세운 뒤 아직 시조에 대한 의견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전라도 지방에서 광산이씨라 하면 동인과 서인으로 갈려 싸우다가 정여립 사건으로 기축옥사 때 삼족이 멸문의 화를 입은 동암(東巖) 이발(李潑)[1544~1589] 집안을 연상한다. 이발은 상서공 이순백의 10세손으로 5세조 이선제(李先齊)[1390~1453]가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제학을 지낸 뒤 이발·이길 형제에 이르기까지 6대에 11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이 때문에 이선제 집안을 10대 홍문 집안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초기 광주에서 광산김씨와 함께 쌍벽을 이룬 토반이었다. 기축옥사 이후 광주 세거 광산이씨는 문과 급제자를 내지 못하였다.
[현황]
2000년 인구 통계 때 광산 본관 이씨는 전국에 36,741명이었다. 그중 7,235명이 광주에 살고 있으므로 역시 광주가 광산이씨 중심지이다. 기축옥사 이후 자손들이 각지로 흩어지고 족보마저 60여 년간 간행하지 못하다가 영조 때인 1748년 광주 한림공파 중심의 『광산이씨세보』를 만들었다. 1670년대 조중운이 쓴 『씨족원류』에 이미 광산이씨는 광주이씨로 나오고 시조를 이순백이라 기록하고 있어서 이 가계에 따르고 있다. 물론 이에 앞서 『고려사』 수찬에 관여한 필문 이선제(李先齊)[1390~1453]가 쓴 『경창군유서』를 보면 이선제의 선조는 왕건 태조 이후 광주 향역집안으로 고조인 이순백이 한림학사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다.
세거지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만산동네로 5세 이선제부조묘, 신도비 등이 있다. 만산동네 입구 수양버들은 이씨들 장원급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북을 내건 ‘괘고수’라 하여 '괘고정수'라는 명칭으로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필문 이선제의 묘지석은 1958년 일본에 밀반출되었으나 2017년 되돌아와 2018년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1993호로 지정되어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청은 2005년 괘고정수 축제를 시작하였다.
상서공파 문중은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도덕산에 1, 2세조 묘단을 설립하고 세장산 아래에 오현당과 영모각을 지어 선조를 기리고 있다. 이숙백을 파조로 하는 한림공파 일부가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황계를 중심으로 살아 근래 필문 이선제 선양사업 등에 협력하고 있다. 한림공파 집안의 선산이 광주광역시 예술의전당 및 시립미술관의 터가 되었다.
[관련 유적]
원산동 괘고정수[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보물 제1993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