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동 하촌마을 당산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366
한자 大支洞下村-堂山祭
이칭/별칭 대지동 하촌마을 동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광주광역시 남구 대지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부유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10년대 일제강점기 초 - 대지동 하촌마을 당산제 중단
의례 장소 할아버지당산 - 광주광역시 남구 대지동 하촌마을지도보기
성격 마을 공동 제사
의례 시기/일시 정월 열나흗날 밤
신당/신체 할아버지당산[느티나무]

[정의]

광주광역시 남구 대지동 하촌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밤에 지낸 마을 공동 제사.

[개설]

대지동 하촌마을 당산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에 하촌마을의 할아버지당산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하촌마을은 조선 중기에 홍주송씨(洪州宋氏)의 이주와 정착으로 형성되었다. 당산제는 마을 형성 이후부터 지냈던 것으로 보이며,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어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

[신당/신체의 형태]

하촌마을의 당산은 할아버지당산으로 마을 앞의 느티나무를 신체로 여긴다. 느티나무는 수령 350여 년의 광주광역시 지정 보호수이다.

[절차]

대지동 하촌마을 당산제는 정월 초에 마을 회의를 열어 연장자 가운데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제관 1명, 축관 1명, 화주 1명 등 모두 3명을 선출한다. 화주는 선정된 날부터 매일 찬물로 목욕해야 하고 궂은 곳을 가거나 궂은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된다. 다른 제관들도 정결함 유지에 각별히 유의한다. 제비(祭費)는 전답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를 두어 거출하는데, 대개 자발적으로 모금하여 부족함이 없었다. 제물(祭物)은 화주와 마을의 깨끗한 사람이 함께 장에 가서 구입한다. 물건은 상품(上品)을 골라 사며 값을 깎아서는 안 된다. 제수(祭需)는 화주집에서 과수댁의 도움을 받아 장만한다. 과수댁은 부부관계가 없어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물로는 삼실과, 삼채, 건어, 백설기 등을 준비하는데, 이때 맛을 봐서는 안 된다. 제기(祭器)는 매년 새로 구입하며 제사가 끝나면 화주가 소유한다. 정월 10일경에 마을 청년들은 당산 주변, 골목, 화주집 등에 금줄을 쳐서 부정의 출입을 막는다. 금줄을 치면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제일(祭日) 아침에는 금줄을 친 곳에 금토를 놓고 골목과 당산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이 되면 농악대가 마을과 당산 주변을 돌며 굿을 쳐 제사의 시작을 알린다. 이후 농악대는 저녁 9시경에 화주집으로 가서 제관들이 제물을 들고 할아버지당산으로 향하면 뒤를 따르며 굿을 친다. 굿은 제물의 진설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제차(祭次)는 가정의 제사와 유사하다. 소지와 음복을 마치면 진설했던 음식을 조금씩 덜어 백지에 싸서 당산나무 옆에 묻고, 미리 준비한 황토로 덮어 헌식을 한다. 여성들은 제당 근처에 갈 수 없고 멀리에서 구경할 수밖에 없다.

[축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읊었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고 정월대보름 날부터 걸궁(乞窮)[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마을 집집을 돌아다니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축원의 노래를 불러주는 일]이 시작되어 그믐날까지 계속된다. 걸궁은 먼저 공동샘에서 굿을 치고 각 가정을 돈다. 산고가 들거나 상을 당하는 등의 궂은 일이 있는 가정은 제외한다. 이때 가정에서는 음식과 술, 곡식 등을 내놓는데, 음식 등은 함께 나누어 먹고 곡식은 모아 마을 자본으로 사용한다.

[현황]

대지동 하촌마을 당산제는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어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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