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361 |
---|---|
한자 | 南江 邊- 樓亭- 風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길섭 |
[정의]
경상남도 함안 지역을 경유하는 남강 주변에 세워진 누각과 정자,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진 풍류.
[개설]
남강은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남계천에서 시작해 진주시를 거쳐 함안군과 의령군의 경계를 따라 흐르다가 낙동강에 합류한다. 남강은 삶의 기본 요소인 먹거리를 공급하는 것에서부터 일상에 지친 심신을 달래 주는 여가의 장소로서 그 주변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어 왔다. 강은 어린아이들의 물놀이 장소였고 어른들의 천렵 공간이었으며 지식인들에겐 풍류와 학문 수양의 장소였던 것이다. 일부 지식인들은 여기에서 나아가 그들의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수양하기 위해 경치가 좋은 강변에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짓기도 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함안군 지역의 남강 변에도 이런 누각과 정자들이 남아 있으니 와룡정(臥龍亭)과 악양루(岳陽樓), 합강정(合江亭), 반구정(伴鷗亭) 등이 그것이다.
[불우한 스승을 위한 제자의 위로, 와룡정]
함안군 군북면 월촌리 월촌 초등학교 뒤편의 남강 변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와룡정은 단층 목조 와가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헌종 때 죽남에 있던 선비 황기익(黃基益)이 문하생과 함께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과거 시험에서 문하생인 홍철태(洪哲泰)는 급제하고 스승인 황기익은 낙방하는 일이 생겼다. 아무리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하지만 자신보다 제자가 먼저 급제한 사실은 스승의 입장에서는 비통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슬픔에 빠진 스승을 위로하기 위해 문하생이었던 홍철태가 정자를 세웠는데 그 이름을 와룡정이라 하였다.
와룡정이라는 이름은 와룡정이 위치한 절벽의 지형이 마치 용이 누워 있는 것 같은 형상을 닮은 데서 유래하였다고 하나, 한편으로는 비록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지만 스승 황기익의 재주를 익히 알고 있던 제자가 스승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해 붙인 이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함안 누정록(咸安樓停錄)』에는 1872년(고종 9)에 진주 목사로 부임하였던 참판 홍철주(洪澈周)가 쓴 「와룡정기(臥龍亭記)」가 실려 있는데 그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홍철주와 십여 년간 동문수학하던 매사(梅史) 황기영(黃基永)이 그를 찾아와 진주남강에서 풍류를 즐기다가 진주보다 더 아름다운 곳으로 소개한 것이 바로 와룡정이었다. 매사 황기영은 자신의 아버지인 남서옹(南捿翁)이 창립한 와룡정에 홍철주가 한번 방문하기를 소망하였다. 홍철주가 황기영과 함께 배를 타고 와룡정에 가서 보니 남쪽에는 적벽이 있고 적벽 서쪽에는 꿈틀꿈틀하는 용의 머리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지면이 끊어 세운 듯이 치솟아 있어 관망하여 보니 울적한 정을 충분히 털어 낼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와룡정의 본래 건물은 6·25 전쟁 때 소실되었고 이후에 함안군에서 개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악양만큼 아름다운 악양루]
악양루는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 악양 마을 북쪽 절벽에 있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1857년(철종 8)에 함안의 선비 악은(岳隱)안효순(安孝淳)이 세운 것이다. 중국의 악양루를 본떠 이름 붙여진 악양루에는 옛날에는 '기두헌(倚斗軒)'이라 쓰인 현판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청남오재봉이 쓴 악양루라는 현판만 남아 있다.
악양루에는 대학자로 일컬어지는 만성(晩醒)박치복(朴致馥)과 일산(一山)조병규(趙昺奎), 심재(深齋)조긍섭(曺兢燮), 회산(晦山)안정려(安鼎呂) 등이 지은 기문(記文)과 상량문(上樑文) 등이 있었다. 이런 대학자들의 방문은 주변의 많은 선비들을 모여들게 하였고, 그들이 모인 자리에는 풍류와 함께 학문에 대한 수많은 토론, 더불어 세상에 대한 근심이 어우러졌을 것이니 악양루와 남강을 오가던 그들의 모습이 눈에 훤하게 비친다. 경치 좋은 남강가에 누각을 세우고 중국의 악양루를 본떠 이름 붙인 안효순은 손수 「악양루」라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중하파릉우아선(中夏巴陵又我先)[중국의 파릉에 우리보다 앞서 있었으니]
누명이악기도연(樓名以岳豈徒然)[악양으로써 이름을 삼은 것이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동남기활여무지(東南圻濶餘無地)[동남쪽이 확 터져 눈앞이 훤하고]
상하부공별유천(上下浮空別有天)[허공에 오르락내리락하니 별천지로구나]
정혜여등래차모(政徯如滕來且暮)[오솔길은 마치 저물녘 등황각 같아서]
문희촉범지의선(文希屬范志宜宣)[범중엄의 문장 같은 글 나 또한 짓고 싶구나]
쇠년임작강호객(衰年任作江湖客)[늘그막에 강호의 나그네가 되어]
만사시인호아선(謾使時人號我仙)[세상 사람들로 하여 나를 신선으로 부르게 하고 싶어라]
안효순은 전형적인 선비의 풍모를 추구하였는데, 중국의 악양루처럼 동남쪽이 툭 터지고 마치 공중에 뜬 것 같이 아름다운 이 악양루에서 범중엄이 쓴 「악양루기」와 같이 좋은 글을 쓰면서 학문을 수양하다가 늘그막에는 신선처럼 유유자적하고자 한다. 이런 소망은 조선 시대를 살았던 많은 선비들의 이상적인 삶의 과정이었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자연을 찾아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암절벽에 한 마리 학처럼 날개를 펴고 우뚝 서 있는 악양루에서는 해 질 무렵 석양이 남강을 빨갛게 물들이는 장관을 볼 수 있다. 그 장관 앞에서 먼 세월을 거슬러 선인들의 풍류를 만나고 처녀 뱃사공들이 노를 저어가는 그 눈물겨운 장면도 떠올려 봄 직하다. 안효순이 건립한 원래의 악양루는 안타깝게도 6·25 전쟁 때 소실되어 이후 1963년에 복원하였으며, 1992년 10월 21일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강호한정의 흔적, 합강정]
합강정은 간송당(澗松堂)조임도(趙任道)가 1633년(인조 11)에 용화산(龍華山) 기슭 강변에 지은 팔작지붕 구조의 단층 와가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임도는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의 제자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 천거되어 한때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가, 인조·효종 때에 대군의 사부로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이곳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조임도는 합강정에 매화와 대, 소나무, 국화를 심어 놓고 학문을 수양하면서 때로 지팡이를 짚고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남긴 시 「화산낙수요(華山洛水謠)」에는 합강정에 은거한 그의 정신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화산억억혜(華山嶷嶷兮)[화산이 높고 높으니]
낙수원원(洛水源源)[낙수가 끝없이 흐르네]
목석여거혜(木石與居兮)[나무와 돌과 함께 지내고]
어조동군(魚鳥同群)[물고기와 새들과 어울리네]
봉호원항혜(蓬蒿原巷兮)[쑥대 무성한 원헌(原憲)의 집에]
송국도원(松菊陶園)[소나무 국화 우거진 도연명의 동산일세]
춘추상로혜(春秋霜露兮)[봄 이슬 가을 서리에]
감모령근(感慕靈根)[선조를 경모하는 마음이 이네]
연비어약혜(鳶飛魚躍兮)[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니]
목격도존(目擊道存)[여기에 도가 있음을 보네]
권중성현혜(卷中聖賢兮)[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고]
몽리희헌(夢裏羲軒)[꿈속에서 복희(伏羲)와 헌원(軒轅)을 만나네]
시의 제목에 나오는 '화산'은 용화산을, '낙수'는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 흐르는 곳을 의미하는데, 조임도는 자신을 둘러싼 자연에서 원헌과 도연명의 집을 상상하며 선조를 경모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선비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책을 읽으며 성현을 대하고 꿈속에서 복희와 헌원을 만나고 싶어 하였다. 이런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면서도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조임도는 또 이 합강정과 그 주변에서 많은 시를 남겼는데 「강재십이영(江齋十二詠)」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합강정이 있기 전부터 용화산 기슭 강변은 많은 지식인들이 즐겨 찾던 장소였는데, 1607년(선조 40) 봄 한강(寒岡)정구(鄭逑)와 여헌장현광, 망우(忘憂)곽재우(郭再祐), 외재(畏齋)이후경(李厚慶) 등이 용화산 아래에서 풍류를 즐긴 곳이 후에 합강정의 자리가 되었다 한다. 이들이 유람하며 풍류를 즐긴 기록은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그 이후 1866년(고종 3) 5월에 성재(性齋)허전(許傳)이 노필연, 조응규 등을 비롯한 70여 명의 문도들과 함께 합강정에 모여 유람하며 지은 시를 모아 『용화동주록(龍華同舟錄)』을 남겼다.
합강정은 1941년에 중수한 이후 1980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조임도의 문집을 인쇄용 목판으로 판각한 190매가 『간송 문집』 책판 및 『금라전신록』 책판이란 명칭으로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며 극진한 효로써 부모를 섬겼던 간송당의 얼이 서린 합강정에서 자신만의 영달(榮達)에 매몰되어 가는 우리 삶의 자세를 다시 가다듬어 보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충효의 넋이 어린 반구정]
반구정은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용화산 기슭에 있는 정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두암(斗巖)조방(趙邦)이 세웠기 때문인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왜적과 맞서 싸운 용맹무쌍한 의병장들의 기개와 숨결이 느껴진다. 반구정에 서면, 두암조방이 임진왜란 후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사람들과 모여서 세상사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멀리하며 여생을 보내려고 낙동강웃개나루[上浦]에 반구정을 세운 뜻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두암 조방은 형 도암(韜巖)조탄(趙坦)과 함께 1592년(선조 25) 4월 22일에 곽재우와 창의(倡義)하였으며, 정암 나루와 남강과 낙동강이 합치는 기강 등지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금오산성의 적을 격퇴하고 화왕산성을 지켰다. 그는 왜적을 무찌른 공이 컸으나 벼슬에 대한 욕심이 없었으며, 여생을 반구정에서 멀찍이 바라다보이는 곽재우의 창암정(滄巖亭)을 수시로 내왕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1607년(선조 40) 초봄에는 정구, 장현광 등과 함께 용화산 아래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즐기기도 하였다. 합강정의 간송당조임도와는 숙질 간이다. 반구정에는 그의 시가 아직도 그대로 전해지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친당진효(事親當盡孝)[어버이를 섬김에 마땅히 효를 다하고]
위국역당충(爲國亦當忠)[나라를 위해서는 마땅히 충이라]
차아구무급(嗟我俱無及)[슬프다 이내 몸은 모두 미치지 못하였으니]
강호한불궁(江湖恨不窮)[세상에 한이 끝이 없도다]
이 시에서 보이는 것처럼 두암조방은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이 두 가지 모두에 모범을 보였으면서도 모두 미치지 못하였다고 안타까워하였다. 그의 이런 마음을 알 수 있는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두암조방은 전공을 세웠지만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고을 선비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무찌른 공을 추대하려고 상소장을 써서 의논하였다. 이를 안 조방은 큰아들을 보내 상소장을 빼앗아 불태우면서 "신하가 나라를 위하고 자식이 어버이를 받드는 것은 사람의 떳떳한 이치이거늘 어찌 스스로 자랑할 일이리오. 내 죽은 뒤라도 혹 이런 일이 있거든 너희들이 일체 금지시켜 지하에까지 수치를 끼치지 말라"고 하였다. 벼슬에 대한 욕심은 추호도 없었고 오직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의 마음만으로 평생을 살다가 여생을 반구정에서 자연과 함께 마감한 것이다.
반구정은 짝 반(伴), 갈매기 구(鷗), 정자 정(亭)으로 '갈매기와 여생을 살고 싶다'는 의미이다. 두암조방은 그의 바람대로 반구정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으로 여생을 보냈다. 조방 사후에 본래의 반구정이 침식되어 퇴락하자 후손들이 1858년(철종 9) 5월에 청송사의 절터였던 용화산 자락으로 옮겨 세웠으며, 1929년 5월과 1980년에 중수하였다. 현재의 반구정은 조방의 묘사 재실(墓祀齋室)로 사용하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앞뜰에 둘레 5.5m, 높이 20m, 가지 폭 30m의 수령 650년 된 느티나무가 지나온 청송사의 긴 세월과 155년 반구정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온 듯하다. 느티나무 아래에 서면 그 옛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나던 의병들과 두암조방의 아침 해처럼 붉게 타오르던 애국심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남강 변 누정에 깃든 선조들의 혼과 얼]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남계천에서 시작하여 진주시를 거쳐 함안군과 의령군의 경계를 따라 흐르다가 낙동강에 합류하는 남강은 예부터 선유(船遊)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 주변에는 지식인들의 학문에 정진하며 세상을 근심하던, 그러면서도 풍류를 즐기던 누정들이 즐비하다. 이런 누정들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선조들의 혼과 얼이 깃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문화유산들을 지키고 보존하면서 선조들의 혼과 얼을 이어받는 것 또한 후손들의 당연한 임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