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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정착사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438
한자 難民定着事業
영어공식명칭 A Refugee Resettlement Projec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하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장소 난민정착사업 사업장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수영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난민정착사업 사업장 - 경기도 화성시 배양동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난민정착사업 사업장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장외리 지도보기|매화리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난민정착사업 사업장 -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신천리 지도보기
성격 난민 정착 사업

[정의]

1950~1960년대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 이루어진 6·25전쟁 피난민 이주·정착 사업.

[역사적 배경]

6·25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1953년, 경기도 지역에 계속해서 피난민이 늘어났다.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 말이 되면, 경기도는 피난을 떠났다가 돌아온 주민들과 서울,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피난민이 모여들면서 전국에서 가장 피난민이 많은 곳이 되었다. 정부는 제한된 수용소 조건 하에서 난민의 도시 유입과 귀환을 차단하고, 피난민의 생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1952년 한미 합동으로 ‘난민정착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화성군에는 1959년~1960년 사이에 4개의 사업장이 운영되었던 것으로 파악되며 사업장이 위치하던 지역은 봉담읍 수영리, 안용면 배양리, 서신면 장외리·매화리, 송산면 신천리이다. 이들 사업장에서 671세대 4,119명이 농업[토지 혹은 임야의 개간]과 염전 개발 사업에 참여하였다.

[경과]

봉담읍 수영리에는 115세대 712명이, 안용면 배양리에는 123세대 695명이 참여하여 토지나 임야의 개간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서신면 장외리에서는 329세대 2,107명이, 송산면 신천리에는 106세대 605명이 참여하여 염전 개발 사업을 수행하였다. 서신면 매화리 사업장은 사업장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으며, 인천, 안성, 평택, 광주 등의 지역에서 모집된 피난민들이 주축이 되어 공생염전[매화4리 소재]을 조성하였다. 이들 피난민은 미수복 강원도[김화·평강·철원 등지]가 고향으로, 경기도 일대 피난민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간척하여 염전을 조성하면 배급과 구호 물품이 지원된다는 조건을 듣고 매화4리로 이주하였다.

1953년 피난민 7가구[약 50여 명]가 현재 매화4리 마을 회관이 있는 곳에 정착하였다. 피난민들은 송교리 살곶이의 뱀산과 궁평리의 함봉산, 멀게는 덕적도에서 채석한 돌을 배에 싣고 들어와 둑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피난민들이 유입되어 1956년에는 350여 가구 1,500여 명이 사업에 참여하였다. 피난민들은 현재 마을 회관 주변에 ‘사택’이라고 불린 연립 주택 형태의 흙집을 지어 거주하였다. 주민들은 ‘하모니카 모양’이라고 설명하는 일자형 단층집으로, 비탈진 지형을 따라 계단형으로 조성되었다.

3년여에 걸쳐 제방[길이 874m, 높이 2.3m]을 쌓아 외해와 육지를 분리하였고, 이렇게 만들어진 간척지를 다시 염전으로 조성하는 작업이 2년여에 걸쳐 진행되었다. 1956년에는 염전 조성과 병행하여 먼저 조성된 12개 염판에서 최초로 소금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한편, 기록에는 발견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구술에 따르면 장안면[덕다3리]에도 사업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또 사업이 진행되지는 않았으나 피난민들의 집단 거주지가 향남읍 문화촌[현재 지번 산 62번지]에도 조성되었다.

[결과]

서신면 매화4리의 경우, 1990년대에 소금값이 떨어지면서 염전을 함께 운영하던 가구들이 남은 가구에 염전을 팔고 외지로 나가는 일이 많았다. 2019년 기준 매화4리에 남아 염전을 운영하는 피난민 출신 주민들은 5가구 남짓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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