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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007
한자 密陽- 邑城- 推火山城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조선/조선
집필자 정석태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과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읍성.

[밀양의 읍성 개관]

추화산성(推火山城)은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산성으로, 신라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가야와 대치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이다. 밀양의 산성 중 추화산성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군사와 행정의 중심지로서 밀양의 치소(治所)가 위치하였던 산성이다.

밀양읍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1497년(성종 10) 현재의 밀양시 내일동 일대에 처음 축조되었다. 나지막한 야산에 기댄 동쪽과 북쪽은 아동산(衙東山)과 아북산(衙北山)을 따라 연결되고, 평지로 열린 남쪽과 서쪽은 밀양강과 해천(垓川)이 해자로 둘러진 배산임수 평산성식(平山城式) 석성(石城)이다. 넓은 평지 중앙을 피한 지형으로 야산과 강물에 의지하여 축성된 덕에 도리어 방어의 취약점을 보완하였다.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것을 다시 축조하였지만, 1905년 개통된 경부선 철도 건설 과정에 모두 헐려 자재로 활용되었다. 지금은 그중 무봉사(舞鳳寺) 뒤쪽 아동산에서 동문까지 옛 읍성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신라·고려 시대의 치소성 추화산성]

추화산성밀양시 교동 모례마을 서쪽 산마루에 있다. 밀양읍성에서 북쪽으로 2㎞ 떨어진 243m 추화산 8부 능선 위쪽 산마루 평평한 곳을 중심으로 둥글게 축조한 석성이다. 동북쪽에는 밀양에서 청도 쪽으로 통하는 국도의 교차지점이 있고, 국도 교차지점의 서쪽에 맞붙어서 밀양 시내로 흐르는 밀양강경부선 철도가 남북으로 뻗어 있다. 밀양 중심부에 위치하여 성의 위치로서는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성곽 정비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발굴 조사 결과를 참고하면, 7세기경 처음 축조되어 통일신라시대까지 추화군(推火郡)·밀성군(密城郡)의 군사와 행정 중심지로서 밀양의 치소가 위치하였던 산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추화산성추화산 성황신(城隍神)이 된 나말여초 광리군(廣理君) 손긍훈(孫兢訓) 장군과 관련지어 볼 때, 고려시대까지도 여전히 밀양의 치소였을 것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밀주구지(密州舊誌)』 기록에 의하면, 추화산성은 손긍훈 장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동 춘복마을에 있는 고려공신 광리군손공 신도비(高麗功臣廣理君孫公神道碑)에는 손긍훈 장군이 신라 말 진성여왕 때 민심을 흉흉하게 하는 괴귀(怪鬼)를 바다 속으로 쫓아 보낸 일화, 고려 태조 왕건을 송도로 찾아가서 군무를 맡은 다음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을 사로잡은 일에 공을 세워 고려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된 사실, 상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로 추증되고 광리군의 봉호가 내려진 행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후 고을 사람들이 손긍훈 장군의 훈공을 추모하여 추화산에 성황사(城隍祠)[창훈각(彰勳閣)]를 세워 제향을 받들었다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나말여초 손긍훈 장군은 향직(鄕職)에 종사하던 부리(府吏)였다가, 추화산성을 거점으로 신라 조정에 충성하고 고려 태조에게 협조하는 대신 후백제에게 대항하면서 밀양 지역 주요 호족 세력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추화산성은 손긍훈 장군 등 밀양 지역 호족 세력의 주요 세력 거점으로서 고려시대 내내 밀양의 치소였다가, 조선 전기 1479년 현재의 내일동 일대에 밀양읍성이 축조되면서 가까운 밀양읍성과 긴밀하게 호응하는 산성으로 남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손긍훈 장군의 신도비에서 민심을 흉흉하게 하는 괴귀를 바다 속으로 쫓아 낸 일화를 통하여, 추화산성은 남해 바다에서 낙동강밀양강을 통하여 끊임없이 침입하는 왜구들을 대적할 때의 방어진지이자 피난성(避難城)으로서도 적극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구조는 동·서·남에 문지(門址)를 두었고, 북쪽으로 계곡을 이룬 평지에는 우물·연못·부속건물을 배치하였다. 성벽은 대부분 석축이다. 현재 석성은 거의 허물어지고 산마루 서남부에 폭 1.5m, 높이 5m가 되는 석축 300m 정도가 남아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430m로 문헌 기록의 2,360척과 거의 부합된다. 이 산성 가장 높은 꼭대기에는 추화산 성황신 손긍훈 장군 사당 성황사 건물 유지가 남아 있다. 그리고 서북쪽 정상에는 유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현재 복원된 추화산 봉수대(推火山烽燧臺)가 있다.

밀양 추화산성은 1990년 1월 16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94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조선시대의 밀양 읍성]

밀양읍성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일대에 있으며, 평지와 야산을 이어서 쌓은 평산성식 석성이다. 둘레는 1,457m에 잔존 높이 271~288m이다. 1479년 처음 축조되었다. 밀양읍성은 전면과 서쪽에 넓은 들판을 거느리고 남쪽에 밀양강을 끼고, 동쪽과 북쪽에 아동산과 아북산으로 둘러싸인 소위 배산임수형의 읍성이다. 동북쪽으로 산지인 아동산과 아북산의 자연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였고, 서남쪽으로 평지에는 방형으로 성벽을 높이 쌓아 군사적인 방어 기능을 향상시켰다. 성의 평면 형태는 다소 부정형적인 사다리꼴이다. 1479년 처음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4,670척, 높이 9척, 동·서·남의 3대문, 우물 4개 소와 못이 1개 소가 있었다. 1590년(선조 23) 부사 신잡(申磼)이 해자를 파고 못 1개 소, 우물 8개 소, 동·서 암문을 늘려서 못 3개 소, 우물 8개 소, 4대문, 2개 암문을 설치하였다. 다가올 전란을 대비하여 사전에 읍성 방비를 굳건히 한 것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사 박진(朴晉)은 읍성 방비를 점검한 다음 관내 군사를 몰아 동래성으로 달려갔지만, 왜적에게 밀려 관내 작원관(鵲院關)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펴고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제1군을 맞아 일전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왜적이 작원관을 끼고 산으로 올라와 옆으로 공격하는 바람에 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종병탄(鍾柄灘)을 건너 밀양성으로 후퇴한 박진은 성내의 식량창고 회내창(會內倉)을 비롯한 군기소(軍器所) 등에 불을 지른 다음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달아났다. 읍성은 왜적에게 유린되어 성 안에 있는 관아와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성 내외 백성들의 재산까지도 일조가 사라지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6년경부터 관아를 복원하고 성내의 크고 작은 건물들을 차례로 재건하여 읍성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복구하는 과정에 처음 창건할 당시 제도와 규모는 많이 변경되었다. 읍성 4대문은 동문이 1칸, 서문이 2층 3칸, 남문이 3층 3칸이고, 북문이 1칸으로 제일 작았다고 한다. 남문은 밀양읍성 정문으로 바다 가까운 곳이라는 뜻에서 ‘공해루(控海樓)’라고 편액을 걸었다. 이밖에 두 곳 암문을 설치하여 상이 나면 암문으로 나갔다고 한다. 또 읍성 안 객사 동북쪽에는 ‘김석장군정(金碩將軍井)’이라는 맑고 깨끗한 우물이 있었는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며 깊이가 10여 척이나 되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우물과 이웃한 연지(蓮池) 또한 1613년(광해군 5) 부사 안륵(安玏)이 축조하였다고 하지만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프랑스 탐험가 샤를 루이 바라(Charles Louis Varat)는 1888년(고종 25)부터 1889년 사이 한양에서 부산에 이르는 우리나라 내륙을 육로로 횡단하고, 체험기를 『조선 종단기』라는 한 책자에 담아 놓았다. 『조선 종단기』에서 샤를 루이 바라는 밀양을 중세 유럽 고성(古城)의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다고 일컬어지는 독일의 뉘른베르크에 비겨서 ‘조선의 뉘른베르크’라고 극찬하였다. 샤를 루이 바라가 밀양을 방문했을 때, 밀양은 1844년(헌종 10) 이인재(李寅在) 부사에 의하여 수백 칸의 건물로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던 밀주관(密州館)이 화재로 영남루(嶺南樓)와 부속건물 요선관(邀仙觀)만 남긴 채 모두 소실된 뒤였다. 그러나 큰 화재를 겪고도 밀양은 여전히 읍성과 읍성 경내가 고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샤를 루이 바라는 자신이 우리나라를 횡단하는 과정에 직접 보았던 많은 다른 읍성들을 놓아두고 오직 밀양읍성만을 ‘조선의 뉘른베르크’라고 극찬한 것이다.

밀양읍성은 샤를 루이 바라가 한양에서 부산까지 조선을 횡단할 당시에 보았고, 또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 「밀양부지도(密陽府地圖)」에도 분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한말 읍성과 관아에 대한 관리가 허술해지고 석축도 무너져 4대문의 기능이 해이해진 가운데 1894년 갑오경장 이후 행정개혁으로 옛 읍성이 점차 사라져 갔다. 그러다가 1905년부터 개통을 시작한 경부선 철도 건설 과정에 모두 헐려 소요 자재로 몽땅 활용되고 말았다. 1927년 군청이 삼문동으로 옮겨가 행정의 중심지가 바뀌고, 1934년 밀양강 배다리 위에 철근콘크리트교량이 건설되어 성내는 근대식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옛 밀양읍성의 모습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내일동내이동의 경계가 되어 있는 옛 밀양읍성의 해자, 남북에 걸친 일직선 성벽 밖에 파 놓은 밀양읍성의 해자는 해천(垓川)으로 복원되어 있다. 그리고 동문고개, 서문안, 북성걸, 유다리, 남지(南池) 등의 지명과 함께 영남루를 중심으로 동북쪽을 감싸고 있는 무봉산과 아북산의 토축(土築) 능선과 석축(石築)과 여장(女墻)의 흔적이 남아 있어 옛 밀양읍성의 윤곽과 경계를 비정해 볼 수 있다. 현재 밀양 영남루가 있는 아동산을 중심으로 무봉사 뒤편에 부분적으로 복원이 되어 있다. 1998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167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조선시대 밀양의 봉수대 유적]

봉수는 변방 국경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 목적으로 설치한 통신수단이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써 변경의 급보를 중앙에 전달하는 동시에 해당 지역의 영진(營鎭)에도 알려 적의 침략에 대비하게 하였다. 조선 세종 때 4군 6진의 개척과 더불어 확립되었다. 경봉수(京烽燧)에서는 변방으로부터 전달된 정보를 병조에 보고하고, 병조는 승정원에 보고하여 국왕에게 알렸다. 해상과 육상을 구별하여, 무사할 때는 1개의 홰를 올리고 왜적이 해안에 나타나면 2개의 홰, 가까이 오면 3개의 홰, 우리 병선과 접전 시에는 4개의 홰, 상륙할 때는 5개의 홰를 올렸다. 육지의 경우는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2개의 홰,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개의 홰, 국경을 침범하면 4개의 홰, 우리 군사와 접전하면 5개의 홰를 올리도록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통신제도가 도입되면서 폐지되었다.

봉수의 주요 연락노선은 함경도 경흥, 경상도 동래, 평안도 강계와 의주, 전라도 순천 등 다섯 군데를 기점으로 삼아서 모두 한양의 남산[목멱산]을 종점으로 하여 연결하였다. 또 다섯 군데의 간선을 직봉(直烽)이라 하였고, 보조노선을 간봉(間烽)이라 하였다. 밀양 봉수노선을 보면 김해 바닷가에 연한 성화예산(省火禮山)에서 올린 봉수를 분산(盆山)과 자암산(子巖山)을 거쳐 밀양 종남산 봉수대(終南山烽燧臺)에 전보(傳報)하는 영남좌도 제2거소(第二炬所) 노선의 간봉선(間烽線)에 해당한다. 밀양 종남산 봉수대에서 접보(接報)한 봉수는 밀양 추화산 봉수대(推火山烽燧臺)와 분항산 봉수대(盆項山烽燧臺)를 거쳐 청도 남산 봉수대에 북보(北報)하여 죽령을 넘어 중부내륙을 지나 경기도 광주 천림산 봉수대(天臨山烽燧臺)에서 한양 남산으로 전달하게 되어 있었다. 백산 봉수대(栢山烽燧臺)는 밀양 종남산과 김해 자암산의 거리가 너무 멀어 접보가 어렵기 때문에 1654년(효종 5) 신설하였다. 김해 자암산 봉수를 받아 밀양 종남산 봉수대로 중계하는 보조봉수대이다.

종남산 봉수대는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종남산 둘째봉우리 정상부에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남쪽으로 김해 자암산에 응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조선 후기부터 백산 봉수대를 신설 응보하였고, 북으로는 추화산에 전보하였다. 남북 봉수대 서로의 거리는 20리이다. 산정에는 못이 있고 석봉(石峯)을 만들었으며 기우제를 지내는 우물도 남아 있다. 그리고 기우정(祈雨亭) 동쪽 기슭에 있었던 봉수대를 현재 복원해 놓았다. 밀양 남산 봉수대는 2000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227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추화산 봉수대는 밀양시 교동 추화산 정상 북서편에 있다. 남으로는 종남산에 응하고 북으로는 분항산 봉수대에 알리는데 남북 간의 거리는 15리이다. 산정에는 성황사(城隍祠)의 유적이 있고 봉수 시설은 현재 복원해 놓았다. 분항산 봉수대는 밀양시 상동면 금산리 북쪽 분항산 정상에 있었다. 남으로는 추화산에 응하고 북으로는 청도 남산에 알린다. 서로의 거리는 30리이며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백산 봉수대는 밀양시 하남읍 백산리 산봉우리에 있었다. 1654년(효종 5) 부사 정남주(鄭昌胄)가 신설한 봉수대로서 남으로는 김해 자암산에 응하였고 북으로는 밀양 종남산에 알렸다. 서로의 거리는 20리이다.

[밀양 읍성·봉수대 유적의 가치]

밀양의 군사적 역사를 알 수 있는 밀양읍성밀양읍성에서 2㎞ 지점에 있는 추화산성은 신라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가야와 대치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이다. 조선시대 읍성의 상당수는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어진 데 비하여 밀양읍성은 100년 이상 일찍 만들어졌다. 왜구 등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밀양을 지켰던 밀양읍성과 추화산성 봉수대는 밀양을 지키는 든든한 보루였다.

현재는 밀양읍성에서부터 추화산성까지 탐방할 수 있는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최근 아북산 뒤쪽에서 아리랑우주천문대 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육교가 설치되어 밀양 영남루에서 아동산 밀양읍성과 동문을 지나고 아리랑우주천문대를 거쳐 추화산성까지 일주할 수 있는 둘레길 아리랑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종남산 봉수대도 위쪽까지 차량이 진입하여 1시간 정도 다소 가파르게 오르면 접근할 수 있다. 한 차례 돌아보면서 힘들게 싸우며 자신의 터전을 지켰던 선조들의 용기와 지혜를 배워 볼 일이다.

이와 함께 조선 말기 밀양을 방문하였던 프랑스 탐험가 샤를 루이 바라에 의하여 중세 고성의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독일의 뉘른베르크에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운 읍성이라는 극찬을 받았던 밀양읍성의 옛 모습도 한 번 상상해 볼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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