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723
한자 李刹修
영어공식명칭 Lee Chal So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선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2년연표보기 - 이찰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4일 - 이찰수 태룡리 장터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1월 20일 - 이찰수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2월 10일 - 이찰수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2월 17일 - 이찰수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33년 8월 24일 - 이찰수 청도경찰서에 3일간 구류
몰년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이찰수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이찰수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단장면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표충사 - 경남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구천리 23]지도보기
활동지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성격 승려|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표충사 승려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이찰수(李刹修)[1902~1968]는 1902년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초 이찰수를 비롯한 표충사의 승려들은 양산 통도사의 승려들을 맞아 불교계의 만세시위에 동참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이장옥, 이찰수, 구연운, 오학성, 오응석, 손영식, 김성흡, 김경오, 이준호, 손종헌 등은 1919년 4월 4일 단장면 태룡리에서 열리는 단장 장날을 의거일로 결정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인근의 사찰과 마을에 연락하는 등의 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이찰수는 17세 소년으로, 심부름을 도맡아 담당하는 등 준비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4월 4일은 송운대사[사명대사]의 춘향일로서, 표충사 근처 주민들에게는 축제일과 같은 날이었다. 이 때문에 장날이 되자 일찌감치 장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정오쯤 각처에서 모인 남녀노소가 경찰 추산으로 5,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찰수를 비롯한 승려들은 민간 복장으로 변복하고 미리 장터에 들어와, 학생 50여 명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이찰수는 특히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만들어 용회동 장터에 펼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책임을 맡았다.

장날 12시 30분쯤 이장옥, 이찰수 등이 대나무 장대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매달아 시장 중앙에 세우자, 구연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했다. 이어서 독립 만세를 삼창하고 수천 명의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를 외쳤다. 이윽고 이찰수표충사 승려들이 깃발을 펼쳐 들고 나팔을 불며 행진을 시작하자, 군중들은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뒤를 따랐다. 장터를 누비던 시위 대열은 돌연 헌병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찰수 등은 군중을 인솔하여 주재소 앞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돌을 던져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시위 군중은 헌병주재소를 파괴하고 헌병군조를 공격할 정도로 격렬하였다. 밀양헌병분견대와 밀양경찰서 병력이 출동하여 발포를 하고서 오후 2시경에 해산하였다.

이찰수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2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요죄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오히려 12월 10일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옥고를 치르던 중 1920년 12월 17일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이찰수는 기개를 꺽지 않고 1933년 8월 24일 오후 10시경 청도역 부근에서 시국 관련 연설을 하려다가 청도경찰서에 검속되어 3일간 구류처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찰수는 1968년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이찰수에게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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