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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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泰瑞殉國碑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97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범호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913년 2월 4일 - 문태서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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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62년 - 문태서 건국 공로 훈장 복장 추서 |
건립 시기/일시 | 1964년 - 문태서 순국비 건립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2년 11월 1일 - 문태서 순국비 보훈처에서 현충 시설로 지정 |
현 소재지 | 문태서 순국비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970 |
성격 | 순국비 |
양식 | 귀부와 비갓이 있는 석비 |
관련 인물 | 문태서(文泰瑞)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78㎝[높이]|62㎝[너비]|30㎝[두께]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에 있는 의병장 문태서의 순국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호남 의병장 문태서(文泰瑞)는 경상남도 안의현 서상면 장구지에서 성장하였으며, 개항기에 영남·호남·호서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6년 함양군 안의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덕유산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뛰어난 지략으로 호남 의병단을 조직하여 일본군을 사살하는 군사 훈련에 전력하였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 계획을 수립하여 일본 통감부로 북진 중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던 일본 경비병과 일본인들을 사살하고 이원역(伊院驛) 건물과 화물 열차에 불을 질러 이원역 소각전(伊院驛燒却戰)을 일으켰다.
그 후 문태서 의병 부대는 덕유산으로 회군하여 무주군을 근거지로 영동, 옥천, 청산, 금산, 상주, 청주, 보은 등 각 지역에 분산되어 유격전을 펼쳐 크고 작은 전투 500여 회에서 최소한 일본군 1,000여 명을 사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1912년 일제 밀정에게 속아 고향인 안의 서상면에서 포박된 뒤 경성으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13년 2월 4일 옥사하였다.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추서하였으며, 그 후 지역민들은 무주 구천동과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장수군 계북면에 기념비를 세워 고인의 뜻을 기리고 있다.
[건립 경위]
1964년 5월 지역민들이 무주 구천동과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장수군 계북면에 문태서의 뜻을 기려 기념비를 세웠다.
[위치]
문태서 순국비(文泰瑞殉國碑)는 덕유산 국립 공원 삼공리 탐방 지원 센터에서 무주 구천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인월담(印月潭) 주변 현충 시설에 있다.
[형태]
귀부와 비갓이 있는 오석 화강암 재질로, 높이 178㎝, 너비 62㎝, 두께 30㎝이다.
[금석문]
비명은 '의병 대장 문공 태서 순국비(義兵大將文公泰瑞殉國碑)'이다. 1995년 광복절에 무주 군수 김세웅이 추기(追記)하였다.
[현황]
2002년 11월 1일 국가 보훈처에서 문태서 순국비와 구천동 수호비를 현충 시설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의병 대장 문태서는 무주 출신은 아니지만 무주 일대에서 의병 운동을 전개하여 공적을 세웠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