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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717
한자 文泰瑞
영어공식명칭 Mun Taeseo
이칭/별칭 문태현(文泰鉉),문태진(文泰珍),문태수(文泰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연표보기 - 문태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8년 1월 - 문태서의 호남 의병단, 무주 지역에서 일본군 습격
활동 시기/일시 1908년 2월 - 문태서의 호남 의병단, 이종성과 무주 주재소 습격
활동 시기/일시 1908년 4월 - 문태서의 호남 의병단, 신명선 의진과 합세하여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에서 일본군과 교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문태서의 호남 의병단,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일본군과 교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8월 17일 - 문태서 체포
몰년 시기/일시 1913년연표보기 - 문태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문태서 건국 훈장 대통령장 추서
출생지 안의군 - 경상남도 안의군 서상면
활동지 무주군 - 전라북도 무주군
묘소 국립 서울 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성격 의병장
성별

[정의]

개항기 무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남평(南平). 본명은 문태현(文泰鉉), 별명은 문태진(文泰珍)·문태수(文泰洙), ‘문태서(文泰瑞)’는 의병장 시절의 이름이다.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의 24세손이며, 아버지는 문병현(文炳鉉)이다.

[활동 사항]

문태서[1880~1913]는 경상남도 안의군 서상면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순종 1) 제3차 한일 협약(韓日協約)이 체결된 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키기 위하여 덕유산(德裕山)으로 들어갔다. 먼저 덕유산 원통사(圓通寺) 부근의 포수 10여 명으로부터 호응을 받아냈는데, 이어서 박춘실(朴春實), 박수문, 전성보 등의 의병이 합세하여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에 문태서는 의병대의 이름을 ‘호남 의병단’이라 칭하고 소속 의병들의 추대를 받아 총참모 지휘장이 되었다.

1908년 1월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고창리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원통사로 들어갔는데,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1908년 2월 이종성(李鍾誠)을 선봉으로 삼아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나 적의 반격으로 체포당하였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4월 10일 신명선(申明善) 의병 부대와 합세하여 의병 100명을 인솔하고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을 습격하였다. 마침 장수 주재소 안에는 한국인 한 명만 있고 모두 의병 토벌전에 나가 있어 무기 등을 빼앗은 뒤 학교와 장수 군청의 부속 건물, 민가 13동을 태우고 무주 방면으로 퇴진하였다.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북도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현재 장수군 계북면 지역]를 공격하였다. 그해 5월 8일에는 전라북도 남원군 문성 동북 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쯤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청북도의 영동·청산·옥천 등지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 경부선 이원역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1909년(순종 3) 호남 의병단의 활동 지역은 점차 확산되어, 대덕산을 거쳐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유격 활동을 이어 나갔다. 4월에는 의병 40여 명이 전라북도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현 진안군 지역]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였다. 호남 의병단이 계속 전과를 올리자 1909년 4월 무주 군민들이 문태서의 항일 구국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철거되었다.

국내 정세가 더욱 불리해지고 결국 1910년 8월 나라가 일본에 병합되자 문태서는 지하 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호남 의병단을 소부대로 분산시켰다. 지역을 확대하여 옥천, 금산, 보은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던 문태서는 1912년 8월 17일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 조기래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경상남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나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묘소]

묘는 국립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장덕리 무주 구천동(茂朱九千洞)의병장 문태서 전승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삼공리에도 문태서 순국비가 있다. 경상남도 함안군 안의면 금천리 광풍루에 의병장 문태서 기공비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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