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1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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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說話 |
영어공식명칭 | Tal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집필자 | 김영미 |
[정의]
전라북도 무주 지역에서 옛날부터 구전되어 전해 내려오는 서사 구조를 가진 꾸며낸 이야기.
[개설]
설화(說話)는 인류에게 언어가 생긴 이래로 존재해 온 일정한 서사 구조를 지닌 구전되는 이야기인데, 바로 이 구전성 때문에 가변성을 전제로 발달해 왔다. 기억에 의존해서 구전되다 보니 이야기 핵심 구조나 중심 모티프를 중심으로 구연자 나름의 첨가, 삭제, 수식 등이 수시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심지어 동일한 구연자가 동일한 이야기를 구연해도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버전(version)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설화는 크게 신화(神話), 전설(傳說), 민담(民譚)으로 구분되는데, 신화가 신성성을 상실하면 전설과 비슷해지고, 전설이 증거물을 상실하면 민담과 비슷해진다. 무주 설화의 경우, 신화적 성격의 이야기는 찾기 어렵고, 전설과 민담적 성격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특히 산간 지방인 무주의 지역적 특성이 무주 설화에 강력하게 반영되고 있다. 무주는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적, 지리적 조건 덕분에 전쟁이 생겼을 때 피난지나 은둔지의 역할을 했다. 덕유산(德裕山), 적상산(赤裳山), 구천동(九千洞), 십승지지(十勝之地) 등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들은 모두 무주의 이러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무주 설화의 유형]
무주 지역 설화의 전승 양상을 보면 덕유산, 적상산, 구천동 계곡 관련 설화로 나눌 수 있다. 덕유산은 무주 지역 설화에서 지역민의 공동체 의식이나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산이다. 덕유산은 난리로부터 백성을 보호해 주는 신성한 산이라는 의식 속에서 하나의 신앙적 대상물로까지 상징화된다. 또한 적상산은 최영(崔瑩)[1316~1388] 장군의 자취와 난리 속에 사고를 무사히 지켜냈다는 지역민의 자부심과 호국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무주 구천동은 구천동 유래담과 결합하여 박문수 관련 설화들이 다수 출현하는데, 이 이야기들을 통해 구천동이 이상향이면서 동시에 구원자를 기다리는 땅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첫째, 덕유산 관련 이야기이다. 먼저, 덕유산과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관련된 유형을 보자. 덕유산의 본래 이름은 광여산(匡廬山)이다. 이성계가 태자를 얻으려고 지리산에서 기도했지만 지리산 산신이 들어주지 않았으나 광여산으로 와서 기도를 하고 태자를 얻었기 때문에 ‘덕유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이성계가 덕유산에서 수도를 했을 때 산에 사나운 짐승들이 많았으나 한 번도 해를 입지 않아 ‘덕이 많은 산’이라고 한 데서 ‘덕유산’이라고 불렀다는 지명 유래 전설도 있다. 이런 이성계 관련 이야기가 지명 유래와 관련하여 덕유산 곳곳에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이성계가 산신제를 올리기 위해 머물렀던 자리는 ‘제자동’, 이성계가 밥을 짓던 곳은 ‘밥진골’, 제사를 올린 곳은 ‘유점등’, 산신제를 올릴 때 동비(銅碑)를 묻었던 곳은 ‘동비날’ 혹은 ‘동비현’, 태자가 태어나 태를 묻은 곳은 ‘태봉’이라고 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다음으로 덕유산이 난리 속에서 사람들을 보호해 주었다는 이야기 유형이다. 왜병들이 덕유산을 지날 때 짙은 안개로 덕유산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보호해 주었다는 「덕유산의 전설」이 대표적인 설화이다. 이러한 전설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역민을 구해 준 신령스러운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덕유산 관련 설화는 ‘신성성의 상징’으로 요약·정리될 수 있다. 덕유산은 이성계의 기도에 응답하는 신성한 산이며, 동시에 백성을 난리로부터 보호해 주는 신성한 산인 것이다.
둘째, 적상산 관련 이야기이다. 적상산과 관련된 설화에는 고려 후기 최영 장군이 등장한다. 최영 장군이 적상산에 이르러 산에 오르다가 길이 막히자 긴 칼[長刀]로 바위를 내리쳐서 바위가 양쪽으로 쪼개지면서 길이 열렸다는 「적상산성 장도 바위」가 대표적인 전설이다. 최영 장군은 적상산이 자연적인 천혜의 요새임을 알아보고 산성을 쌓아 승병을 양성하도록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적상산에는 거란국이나 왜구의 침입 때에 인근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켰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지켜낸 훌륭한 산이라는 호국의 이미지가 덧붙여졌다.
셋째, 무주 구천동 관련 이야기이다. 이 유형의 설화는 구천동 유래담과 얽혀서 이상향이라는 상징성을 획득하고 있다. 구천동 유래담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구씨와 천씨가 많이 살아서 그 두 성씨를 따서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다. 대부분 이 유래담은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1691~1756]’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주 구천동에 간 어사 박문수」, 「무주 구천동에 암행간 박문수」, 「무주 구천동에 출두한 박문수 어사」, 「박문수 어사의 무주 구천동 순행」, 「박문수와 무주 구천동 초씨」, 「박문수의 구천동 순행」, 「박문수 이야기」, 「어사 박문수의 일화」, 「화를 면하게 해 주고 결의형제 맺은 박문수」, 「구씨 부자를 구한 박문수」, 「박어사의 지혜」, 「박문수와 우복동의 반란」, 「구천동 유래」[이하 한국 구비 문학 대계(http://gubi.aks.ac.kr)], 「구천동과 박문수」[『내 고장 전설집』(1992)], 「어사 박문수」[『전북 구비 문화 자료집』(2008)] 등등 구천동과 어사 박문수 관련 설화는 대단히 많다.
다른 하나는 백련사를 둘러싸고 빼어난 절경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의 수도승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그 수가 구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구천인(九千人)의 둔지(屯地)라는 의미의 ‘구천둔(九千屯)’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하여 ‘구천동(九千洞)’이 되었다는 유래담이다. 이 유형의 설화들은 구천동 유래담이면서 동시에 구천동의 이상향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무주 설화의 특징과 의의]
무주 지역의 설화는 일반적으로 민중적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 전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덕유산과 적상산, 구천동이라는 천혜 자연, 지리적 조건이 전설에 강력하게 반영되어 ‘신성’, ‘호국’, ‘이상향’의 이미지를 더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설화를 전승시키는 주체들은 이야기의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최영 장군이나 이성계 같은 역사적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구원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어사 박문수 이야기를 통해 구천동과 같이 지역적, 지리적으로 외부와 차단된 곳에서의 문제 해결 방식을 엿볼 수도 있다. 최영, 이성계, 박문수 등의 인물이 무주라는 장소와 결합되면서 무주 지역 설화는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과 삶의 양태를 적극적으로 이해해 주고 그에 의미 부여를 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