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1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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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茂朱-新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곽장근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에 있는 신라의 유적과 유물.
[개설]
고려 인종 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전라북도 지역에도 신라 땅이 등장한다. 무주군 무풍면과 남원시 운봉읍 일대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때 남원시 운봉읍은 ‘철의 왕국’이자 ‘운봉 가야’로 이미 소개된 운봉 고원을 가리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시대 3대 예언서로 꼽히는 『정감록(鄭鑑錄)』에 사람들이 살기 좋은 십승지지(十勝之地)에도 그 이름을 함께 올렸다. 백두 대간 산줄기를 중심으로 운봉은 동쪽, 무풍은 서쪽에 자리한다. 아마도 신라가 두 갈래 길로 전북 동부 지역으로 진출하였음을 말해 준다.
[무주 현내리 신라 토기와 나제통문]
1970년대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에서 신라 토기가 발견되었다. 무풍면 현내리 북리 마을 동쪽에 남북으로 뻗은 구릉지 정상부가 여기에 해당된다. 면담 조사 때 북리 마을 주민들은 “1970년대 초 밭을 개간하다가 우연히 고름장에서 유물이 많이 나왔다”고 제보해 주었다. 이곳에서는 12점의 토기류가 나왔는데, 이 토기들은 무풍 초등학교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삼국 시대 토기류는 신라 토기와 백제 토기가 반씩 섞여 있다. 신라 토기는 대각에 장방형의 투창이 엇갈리게 뚫리고 배신이 깊은 굽다리 접시[고배(高杯)]류와 구연부가 외반되고 동체부는 구형을 이루며 그 바닥에 대각이 달린 대부 장경호(臺附長頸壺)[굽다리 긴목 항아리]·파수부잔(把手附盞)[손잡이 달린 잔]·개(蓋)[뚜껑] 등이 있다. 백제 토기는 짧은 목 항아리[단경호(短頸壺)]·대부 직구호·병으로 기종이 매우 다양하다.
무주 무풍면 현내리는 신라 무산현(茂山縣)의 행정 치소로 『정감록』에 삼재를 피할 수 있는 명당 중 명당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아직까지 한 차례의 발굴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그 성격을 예단할 수 없지만 일단 신라 고분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6세기 이전에 이미 신라가 백두 대간을 넘어 무주군 무풍면으로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웅진기 동안 백제와 신라의 사행로(使行路)가 나제통문을 통과한 것으로 추측된다.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자리한 나제통문은 높이 5m, 길이 10m 인공 석굴로 일제 강점기 때 뚫었다.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양쪽 지역의 언어와 풍습이 다르다. 삼국 시대 때 나제통문을 경계로 서쪽은 백제의 적천현(赤川縣), 동쪽은 신라의 무산현 소속이었다.
[웅진기 백제와 신라의 사행로 복원]
우리나라의 교통로가 어떠하였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상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선사 시대부터 정치적인 중심지를 거점으로 하여 교통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을 것으로 점쳐진다. 역사 시대 때는 교통로가 정치적·군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교역품 수송을 위한 교역로로 경제적 의미도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교통로가 서로 교차하거나 교통의 관문을 이룬 곳은 일찍부터 대부분 거점 지역으로 발돋움하였다. 백두 대간의 큰 관문인 육십령과 치재를 관할한 진안 고원의 장수 가야와 운봉 고원의 운봉 가야가 가장 대표적이다.
삼국 시대 때는 각국이 더욱 광범위하게 영역을 확장해 나감에 따라 수도를 중심으로 교통로를 재편성함으로써 그 이전 시기보다 훨씬 잘 정비된 교통로의 조직과 개설이 이뤄졌다. 특히 백제는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김에 따라 수도로 통하는 사행로를 중심으로 교통망이 재편성되었다. 당시 교통로의 재편 과정은 교통의 중심지에 행정 치소의 설치, 전략상 요충지에 축성, 관문의 개척, 교량 부설, 교통 장애 요인의 제거 등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삼국 시대 교통로의 재편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곳이 백두 대간 서쪽 진안 고원이다.
삼국 시대 사행로를 복원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경제성과 안정성, 신속성이다. 무엇보다 백제와 신라를 이어 주던 간선 교통로는 양국 사신들이 왕래하던 사행로와 서로 중복된다. 한성기 때 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이 오가던 사행로를 복원하기 위한 연구는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사행로의 구체적인 경로와 함께 그 역사적인 의미도 심층적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웅진기부터 사비기까지 백제 사신들이 신라를 방문할 때 왕래하던 사행로는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 있다. 이제까지 축적된 고고학 자료로 백두 대간을 넘는 웅진기 사행로를 추정 복원하려고 한다.
백두 대간 덕산령을 넘는 웅진기 백제와 신라의 사행로이다. 공주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향하면 논산시 연산면에서 황룡재를 넘어 논산시 벌곡면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갑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금산군 진산면과 금산읍을 경유하여 금산군 부리면에 도달한다. 전북과 충남의 도계인 지삼치를 넘어 남대천이 금강 본류로 흘러드는 무주군 무주읍 용포리 나루에서 금강을 건넌다. 다시 남대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나제통문을 지나 무주군 무풍면에 당도한다. 신라 무산현의 행정 치소인 무주군 무풍면 소재지 동쪽 백두 대간 덕산령을 넘어 성주와 대구를 거쳐 사행로의 종착지인 경주까지 이어진다.
[백제의 정치적인 불안과 신라의 진출]
2001년 준공된 진안 용담댐 수몰 지구 내 구제 발굴에서도 신라 토기가 출토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진안 황산리 가야계 구멍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관묘(竪穴式石棺墓)]에서 가야·백제 토기가 반씩 섞인 상태로 신라 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안 고원 내 가야계 구멍식 돌덧널무덤에서 5세기 후엽 신라 토기가 처음 출현한 것은 웅진기 백제와 신라의 사행로가 진안 고원의 나제통문을 통과하였음을 암시한다. 진안군 안천면 승금리에서 대부 장경호와 굽다리 접시[고배(高杯)] 등 신라 토기가 출토되어 그 개연성을 더해 주었다. 백두 대간의 육십령로·월성치로가 통과하는 길목으로 금강의 폭이 200m 넘게 워낙 넓어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고 한다. 동시에 진안 고원에서 금남 정맥을 넘어 논산을 경유하여 공주, 부여 방면으로 가기 위한 사람들도 대부분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금산군 추부면 장대리에서도 신라 토기가 상당량 출토되었다. 진안 고원에 속한 금산 분지 동북쪽 경계로 모두 28기의 삼국 시대 횡구식 돌덧널무덤이 조사되었다. 철마산 서쪽 구릉지에 장대리 유적이 자리하며, 돌덧널무덤은 대체로 서남쪽 기슭에 입지를 두었다. 유물은 토기류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유개식·무개식 굽다리 접시를 중심으로 대부 장경호와 직구호(直口壺), 단경호(短頸壺)[짧은 목 항아리], 파배(把杯)[손잡이 달린 잔], 병, 발형 토기(鉢形土器) 등 기종이 매우 다양하다.
유구와 유물의 속성을 근거로 금산군 추부면 장대리 앞트기식 돌덧널무덤[횡구식 석관묘(橫口式石棺墓)]은 조영 시기가 대체로 6세기 중엽으로 비정되었다. 이렇듯 6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진안 고원에서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신라의 진출과 함께 영역화를 암시하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정치적인 불안에 빠지자, 이를 틈타 봉수 왕국인 장수 가야가 진안 고원 일대에 대규모 축성과 봉수망을 구축한다. 어찌 보면 갑자기 백제의 영향력이 감소하자 장수 가야가 진안 고원 일대를 영역에 편입한 뒤 강력한 방어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신라도 진안 고원 일대에 큰 관심을 보여 한동안 장수 가야와 갈등을 초래한다. 백제 무왕이 진안 고원의 금산 분지를 회복하기 이전까지 줄곧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점쳐진다. 이렇듯 선사 시대 이래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인 진안 고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삼국이 치열하게 각축전을 펼쳐 백제와 가야,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한다.
[운봉 고원의 제철 유적과 아막성 철의 전쟁]
신라의 모사현이 설치된 운봉 고원은 달리 ‘신선의 땅’으로 유명한 곳이다. 동시에 30여 개소의 제철 유적으로 상징되는 ‘철의 왕국’이자 백제와 가야를 이어 주던 간선 교통로의 관문이다. 삼국 시대 때 운봉 고원에서 생산된 니켈 철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를 중심으로 대가야, 소가야가 앞다투어 최고급 위세품을 운봉 가야에 보냈다. 그런데 554년 백제와 가야 연합군이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함에 따라 신라가 운봉 고원을 장악하였다. 이를 계기로 백두 대간에서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 한동안 형성되었다. 남원 봉대리 2호분에서 삼국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어 고고학 자료로 운봉 고원의 역동성을 방증해 주었다.
삼국 시대 때 백제와 신라의 최대 격전장이 신라 아막성이다. 운봉 고원 서북쪽 관문인 치재 남쪽 남원 성리산성을 아막성으로 비정한 견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흥부전' 이야기의 발복지로 유명한 남원시 아영면 성리 상성 마을 남쪽 성리산성으로 그 평면 형태가 남쪽이 약간 긴 방형이며, 성의 둘레가 633m이다. 남원 성리산성의 동쪽에는 남원 월산리·두락리 고분군, 북쪽에는 치재·복성이재와 봉화산 봉수, 남쪽에는 구시봉 봉수가 있다. 운봉 가야가 처음 터를 닦고 백제와 신라에 의해 개축되었고, 현재의 성벽은 후백제 도성의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 후백제 견훤이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아막성을 차지하기 위해 20년 넘게 신라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백제 무왕은 즉위 3년 만에 4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아막성을 공격하였지만 대패하였고, 616년에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624년 백두 대간을 넘어 운봉 고원을 다시 백제에 예속시켰고, 이를 발판으로 경남 함양까지도 백제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다. 백두 대간에서 20년 넘게 계속된 아막성 전투는 철 산지인 운봉 고원을 차지하기 위한 ‘철의 전쟁’이다. 백제로서는 무왕의 중흥 프로젝트를 위해 대규모 철 산지인 운봉 고원의 장악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운봉 고원의 철 산지를 탈환하기 위한 ‘철의 전쟁’에서 백제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백제 중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전라북도의 신라 문화유산에 관심과 지원을]
백두 대간 속 무주군 무풍면과 운봉 고원은 가야와 백제, 신라의 역사와 문화가 하나로 응축된 ‘야외 박물관’이다. 호남 지방에서 유일하게 삼국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하는 곳으로 삼국 시대 때 가장 역동적인 역사의 발전상을 보였다. 아직은 무주군 무풍면 일대를 대상으로 제철 유적 지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단정할 수 없지만, 이곳으로 신라 진출이 철 산지의 장악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에 무주군 무풍면과 설천면, 안성면 일대 지표 조사에서 20여 개소의 제철 유적이 존재를 드러냈다. 무주군과 인접한 장수군에서는 70여 개소의 제철 유적이 발견되어 그 개연성을 더욱 높였다.
삼국 시대 때 진안 고원을 차지하려고 백제와 가야, 신라가 서로 치열하게 각축전을 펼쳤다. 아마도 장수군을 중심으로 진안 고원의 구리와 철 산지를 장악하려는 삼국의 국가 전략이 주된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6세기 전반 진안 고원 속 철의 왕국인 장수 가야가 백제에 복속되었고, 백제와 후백제의 멸망 이후에는 진안 고원이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진안 고원을 경유하여 백제 혹은 후백제의 도읍을 연결해 주던 사행로가 끊기고 대규모 철산 개발이 중단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2013년 강원도 영월읍에서 전국 십승지지 읍·면장이 한자리에 모여 십승지지의 발전 방향과 협력 방안을 모색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 무주군 무풍면이 십승지지에 이름을 올린 것은 빼어난 자연 환경 못지않게 교통의 중심지와 대규모 철산 개발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백두 대간 산줄기 양쪽 무주군 무풍면과 운봉 고원에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전북의 신라 문화유산을 찾고 알리는 데 학계와 행정 당국의 큰 관심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전북의 역사와 문화가 올곧게 자리매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