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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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山東學農民運動 |
영어공식명칭 | Gosan Donghak Peasant Revolution |
이칭/별칭 | 고산 동학농민혁명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대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94년 11월 17일 - 고산 동학농민운동 산천리전투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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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894년 11월 17일 - 고산 동학농민운동 산천리전투 종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94년 11월 18일 - 고산 동학농민운동 고산읍전투 발생 |
종결 시기/일시 | 1894년 11월 18일 - 고산 동학농민운동 고산읍전투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고산 동학농민운동 발생 장소 -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대하리 |
발생|시작 장소 | 고산 동학농민운동 발생 장소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
종결 장소 | 고산 동학농민운동 종결 장소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
[정의]
1894년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및 동상면에서 벌어진 동학농민운동.
[개설]
우금치전투 이후 고산[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조선군]으로 구성된 연합군과 벌인 전투로, 1894년 11월 17일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대하리에서 일어난 산천리전투와 1894년 11월 18일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읍에서 일어난 고산읍전투를 합쳐 ‘고산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부른다.
[역사적 배경]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인근 6개 면은 조선시대에 전라도 고산현으로 단일행정구역에 속했었다.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으로 고산현이 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고, 1895년 전주부 고산군, 1896년 전라북도 고산군이 되었다. 1914년까지 고산, 비봉, 화산, 운주, 경천, 동상면 일대를 관할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고산군은 폐지되었다. 별호는 봉산(鳳山)이었다. 따라서 1894년 고산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독립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웃하고 있는 삼례[현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에서 발생한 1892년 ‘삼례취회[일명 삼례집회]’, 1894년 9월에 일어난 ‘삼례기포’, 동학농민군의 최후 항쟁이었던 대둔산 동학최후항쟁[일명 대둔산전투]와 함께 다른 형태의 동학농민운동이 고산현에서도 일어났다. 한편 1893년 3월에 충청도 보은에서 ‘보은집회’가 개최될 때 부안의 동학도들이 보은으로 오르내리는 길목에 있던 곳이 전라도 고산이었다.
[경과]
고산현 일대 동학교도로 가장 먼저 나오는 인물은 박치경(朴致京)이다. 박치경은 1884년 6월,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관의 추적을 피해 익산(益山)의 사자암(獅子庵)에 은신할 때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이로 보아 박치경이 동학에 입교한 시기는 최소한 1884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박치경은 1893년 2월 보은취회에 참여했으며, 동학농민군 2차 봉기 때에는 고산에서 전현문(全顯文)·유종춘(柳宗春)·김택영(金澤永)·김낙언(金洛彦)·최영민(崔永敏)·신현기(申鉉基)·이은재(李殷在)·서인훈(徐仁勳) 등과 함께 기병(起兵)했다.
또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현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철수한 후 소강상태에 있던 1894년 6월, 고산 화평(花坪)[현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화평리]의 상황이 적혀 있는 『갑오약력』에 의하면 “그 근처의 동도들은 십 수백 명씩 무리를 이루어 말을 타고 일산(日傘)을 펴고 날마다 교대로 찾아와서 돈이나 재물을 토색하고 패악한 짓을 하였다. 나는 이리저리 대접하면서 날마다 빌면서 지냈는데, 8월 초에 이르러 실로 견디기 어려웠다”라는 기록을 통해 동학농민군이 고산현의 행정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정부군과 일본군의 기록에 의하면, 고산에서 두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다. 관군과 일본군은 1894년 11월부터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서기 시작해 1894년 11월 16일 진안읍에서 전투를 벌여 동학농민군 수십 명을 사살한 이후 전라도 고산 지역으로 향했다. 1894년 11월 17일 고산현 산천리(山川里)[현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대하리 산천마을]에 도착해 동학농민군 수백 명과 접전했는데, 이때 동학농민군 30여 명이 희생당했다. 산천리전투 이후 1894년 11월 18일, 고산읍(高山邑)에 도착한 관군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 당시 관군의 기록은 동학농민군이 몇 만이었다고 적혀 있지만, 정확한 숫자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수백 명이 사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 30명을 사로잡았는데, 이들 중 접사로 고산에 거주하던 이만학(李晩學), 여관서(呂寬西), 진안읍에 거주하는 김치서(金致西) 등 3명은 그대로 둔 반면에 창성도(倉聖道), 임성원(林聖元), 김중이(金仲伊) 등 3명은 총살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했다고 한다. 이와 달리 교도대 병사와 일본 병사는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 그리고 탈취한 여러 군수품을 그대로 둘 경우에 후환이 있을까 염려되어 총 200자루와 창 300자루를 파괴하고, 화약 100여 근은 물에 띄웠으며, 탄약 10여 말은 주조하고, 그 나머지 긴요하지 않은 물건들은 태워버렸다. 이처럼 산천리와 고산읍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수백 명이 전사한 것으로 확인되지만, 그 구체적인 장소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산현감은 고산읍전투 이후 생존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여 체포할 계획이었고, 1895년 1월 22일 고산읍을 방문한 관군은 “읍호(邑戶)가 수백 호 남짓했으나 외양은 쓸쓸하여 파괴된 형국을 알 만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고산읍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의 일부가 대둔산에 들어가 최후 항쟁을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
고산에서 벌어진 두차례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잔여 동학농민군 일부와 진산의 동학농민군이 대둔산에 들어가 최후 항쟁을 전개했다.
[의의와 평가]
고산 동학농민운동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884년 이전에 형성되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이들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것은 우금치전투 이후 고산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연합부대에 맞서 고산의 동학농민군이 2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인 데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