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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039
한자 衣生活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집필자 최미선

[정의]

경기도 양주 지역민들의 의복 및 이와 관련한 풍속이나 경향.

[개설]

양주 지역의 경우 서울 지역과 자연적 환경이나 사회적 환경의 지역 차가 심하지 않아 예로부터 의생활에서도 지역별 차이가 크게 드러나지 않은 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산업화로 인한 대중 사회의 성립과 더불어 각종 의복의 대량 생산 체제가 확립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서양식 의생활이 일반화되면서 지역에 따른 의생활의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었다.

[일상복]

양주 지역의 일상복을 어린이와 어른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어린이

근대 이후 어린이의 일상복은 돌 이전의 신생아들에게 입히는 ‘배냇저고리’나 ‘배내옷’, 돌 이후에 입히는 광목 바지, 저고리, 버선 등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부유한 가정에서는 비단이나 인조견을 사용하였고 별도로 조끼 등을 만들어 입히기도 하였다. 흰색 광목의 경우 때가 타는 것을 방지하거나 시각적 효과를 위해 치자, 오미자, 쑥, 수수 등의 재료로 노란색, 분홍색, 파란색, 빨간색 물을 들이기도 하였으나, 1930년대 이후로는 주로 시장에서 화학 염료를 구입해 염색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가 계속 이어지면서 옷에 담긴 민족적 정서의 말살을 강요당하였고, 1950년대의 전쟁과 1960년대의 산업화를 거치면서 양복에 밀려 우리 옷에 담긴 한국 고유의 의미와 상징성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나마 배냇저고리나 배두렁치, 풍차바지 등의 신생아 복식은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의 어린이 복식은 전통과 현대의 과도기를 겪는 과정에서 전통 소재인 무명이나 모시에서 융이라는 현대 직물로 바뀌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현재 전승되는 신생아 복식 중 대표적인 것으로 우선 ‘처네’, ‘천의’라고도 하는 ‘포대기’가 있다. 포대기의 옷감은 초록과 홍색의 공단이나 명주, 실크가 사용되었으며 속에 솜을 넣어 누빈 솜포대기가 많았다. 전통적으로 출생 후 초사흘이 지난 신생아에게 입히는 배냇저고리 또는 배내옷은 하의가 없는 저고리 형태로, 길이는 아이의 허벅지나 다리 끝 부분을 덮을 수 있는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재료는 광목이나 무명이 일반적이었고 가정 형편에 따라 융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아이의 백일옷은 흰색으로 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한자의 ‘희다[白]’라는 의미와 숫자 ‘100[百]’의 음이 동일한 것에 착안한 것이다. 따라서 흰색 옷은 아이가 장수하길 기원하는 부모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돌옷은 아이의 첫 생일을 기념하는 돌잡이 때 입히는 옷으로 풍차바지, 저고리, 조끼, 버선을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부유한 가정의 경우, 남자아이는 기본 옷 외에 색동저고리나 전복, 복건, 돌띠, 타래버선을 착용하였고, 여자아이는 풍차바지 위에 치마, 색동저고리, 조바위를 착용하기도 하였다.

2. 어른

근대 이후 어른의 복식은 한복 흰색 저고리에 검정색이나 흰색 바지와 치마가 기본이었으며 보통 광목이나 무명을 사용하였다. 봄과 가을에는 겹으로, 여름에는 홑으로, 겨울에는 솜을 넣어 누벼 입었다. 신발은 주로 짚신과 고무신을 신었다. 여성의 일상복은 주로 광목 저고리, 치마, 버선, 고쟁이와 속치마, 행주치마로 나눌 수 있는데, 1940년대 이후로는 ‘몸빼’라고 하는 생활복 겸 작업복을 강제적으로 입으면서 행주치마를 대체하는 경우가 많았고 현재까지도 일부 전승되고 있다. 남성의 하의는 속옷과 바지, 상의는 속옷·저고리·조끼 등을 입었고, 외출 시에는 마고자와 두루마기를 걸쳐 입기도 하였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한복 외에 양복바지와 상의, 잠바, 와이셔츠 등을 입기 시작하였다.

[의례복]

양주 지역의 의례복을 혼례복과 상례복·장례복·수의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혼례복

혼례 때 여자들이 입었던 치마와 저고리는 신랑집에서 보낸 채단(采緞)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그 위에 원삼 또는 활옷을 입었다. 남자의 경우 바지·저고리에 사모, 각대, 목화를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 상례복·장례복·수의

상복의 경우 남자는 삼베로 만든 굴건제복(屈巾祭服)을, 여자는 광목과 같은 흰색 천으로 된 상복과 허리띠·머리띠를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망자가 입는 수의는 삼베로 만들며, 보통은 바지와 저고리만 준비하고 가정 형편이 조금 나은 집에서는 두루마기까지 준비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의를 만들 때는 뒷바느질로 마무리를 하지 않았는데 뒷바느질을 하면 저승으로 간 혼령이 그곳에 잘 머무르지 못하고 이승을 배회한다고 믿었던 민간 신앙 때문이었다.

[의의]

우리 옷은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된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수난과 더불어 그 회복이 채 이뤄지기도 전에 발발한 6·25 전쟁과 196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급속히 자리 잡은 서양식 의복에 밀려 그 의미와 상징성이 많이 퇴색되었다.

그렇지만, 1990년대 이후 급격하게 팽창된 양주시 일원의 도시 지역과는 달리 농촌 지역에서는 소박하고 실용적인 전통 서민의 의생활 양식의 일부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에도 농업 등의 1차 산업 종사자들은 여전히 1970~1980년대의 실용과 편리함을 중시한 의생활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농사용 작업복과 같은 의복 양식은 1950년대의 모습과도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여전히 편하고 질긴 몸빼를 선호하며 단지 소재나 색상이 좀 더 다양해졌을 뿐인 버선 모양의 양말을 즐겨 신는다.

또한 의생활 중 상황에 따른 옷의 구별과 선택이 확실해 결혼식이나 회갑연, 종교적인 행사 등과 같은 의례식에는 주로 한복을 착용하고 있다. 달라진 의생활 속에서 시대별 복식의 의미는 다르지만 예를 갖추기 위한 기능이나 실용적이고 편리함을 중시한 우리옷의 기능은 아직 퇴색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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