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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50
한자 李康國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이강국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7년연표보기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30년연표보기 - 경성제국대학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32년 5월연표보기 - 베를린대학으로 유학
활동 시기/일시 1930년연표보기 - 조선사회실정연구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32년 5월연표보기 - 프롤레타리아과학동맹, 혁명적 아세아인회에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0월연표보기 - 독일공산당에 입당
활동 시기/일시 1936년 4월연표보기 - 적색노동조합 준비조직에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38년 12월연표보기 - 원산철도국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42년 5월연표보기 - 징역 2년, 집행 유예 5년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44년연표보기 - 건국동맹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연표보기 -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6년 9월연표보기 - 월북
활동 시기/일시 1953년 3월연표보기 - 남로당계 숙청 시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55년 12월연표보기 - 사형을 선고 받음
출생지 경기도 양주시
거주|이주지 서울
학교|수학지 보성고등보통학교 - 서울
학교|수학지 경성제국대학 - 서울
학교|수학지 베를린대학 - 독일
성격 공산주의 운동가|정치가
성별
대표 경력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공산주의 운동가이자 정치가.

[활동 사항]

이강국(李康國)[1906~1955]은 경기도 양주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8년 서울로 이주하였지만 집안이 몰락하여 충청남도 예산 등지의 친척 집을 전전하며 성장하였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보성중학교에 특대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며, 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당시 『동아일보』에 그의 사진과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1927년 법문학부에 입학하여 스승인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를 만난 이강국은 그가 주도하는 성대학생독서회(城大學生讀書會)에 참가하였으며 그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대학 연구실에서 조수로 일하였으며 최용달(崔容達), 박문규(朴文圭) 등과 조선사회실정연구소를 조직하였다. 이 시기 이강국은 노동자들의 조직과 훈련 및 조선의 정치·경제·문화 등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한편, 경성제국대학 졸업생이 중심이 되어 만든 잡지인 『신흥(新興)』의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5월 처남의 경제적 원조로 독일로 유학 가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동년 10월 이강국은 혁명적 아세아인회와 프롤레타리아과학동맹에 간여하면서 독일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5년 11월 미야케 교수 사건 관계자라는 이유로 귀국하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기소 유예로 석방되었다. 1936년 4월 원산에서 적색노동조합 준비 조직에 이주하(李舟河)와 함께 가담하였고, 코민테른[공산당의 통일적인 국제 조직] 제7차 대회의 결의를 전달하였다.

1938년 10월 서울에서 이주하·최용달과 회합하여 운동 자금 및 좌익 문헌 입수와 인민 전선 운동 전개 방책을 논의하였다. 동년 12월 원산철도국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며, 1941년 5월 예심이 종결되었다. 그러자 이강국은 공산주의 실천 운동에는 손을 떼겠지만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는 내용의 전향문을 쓰고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출옥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체포되어 1942년 5월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출옥 후 1944년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항일 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및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1월 5당 회의에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여하여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으로 선출되었고, 6월 좌우합작위원회에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대표로 참여하였다. 1946년 9월 미군정의 정책을 규탄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체포령이 내려지자 김수임(金壽任)[이강국의 애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강국이 월북 후 그의 지령을 받아 남한에서 간첩 활동을 한 인텔리 여성]의 도움을 받아 월북하였다.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사무국장, 1948년 9월 상업성 법규국장, 1950년 12월 인민군병원 원장, 1951년 11월 무역성 일반제품수입상사 사장으로 재직하는 등의 활발한 행적을 보였다. 김수임을 통해 대남 공작을 수행하였으나 1953년 3월 남로당계 숙청 당시 대남 공작을 자의로 파멸시켰다는 죄상을 뒤집어쓰고, 미국의 간첩이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재판소인 군사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55년 12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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