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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01
한자 獨立運動家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한정수

[정의]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경기도 양주 출신 인물들.

[개설]

1910년 불법적 한일 강제 합방이 이루어지고, 1910년에서 1920년대에 걸쳐 점차 일제는 식민지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이 잇따르면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움직임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이는 3·1 만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후에도 국내 및 국외에서 직접 무력 투쟁과 함께 노동 운동, 계몽 운동, 민족주의 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양주 지역의 많은 이들도 1945년 해방 직전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였다.

[3·1 운동 전후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1910년대 일제는 조선인들의 저항을 무단 폭력 통치를 통해 짓밟았다. 경무부와 헌병대가 그 역할을 전담하였다. 이러한 일제에 대해 한일 강제 합방의 부당함과 독립을 위한 노력, 즉 항일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대한제국기 항일 의병 운동을 계승하면서도 북간도 등 만주 지역으로의 이주와 투쟁, 국내 비밀 결사와 사립 학교와 서당 등을 통한 항일 의식 고취 등 항일 운동으로 나타났다.

양주 지역 출신 인물 중 김기하(金基河)는 만주로 망명,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거주하면서 1919년 해당 지역 조선인들로부터 독립 군자금 모금 등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의병 활동에 참여한 바 있는 김병기(金秉氣)는 1913년 9월 결성된 항일 투쟁 단체인 독립의군부(獨立義軍部)에 가담, 활동을 하였으나 191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1910년대부터 양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는 가운데 1919년 양주에서의 3·1 만세 운동은 특히 군민들의 적극적 조직적 참여로 이루어졌다. 3월 13일~15일까지 3일간 지속적으로 만세 운동이 펼쳐졌던 것이다. 당시 구장(區長)들이 상당수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특히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출신 안종규(安鍾奎)[1889~1946] 활동이 돋보였다. 또한 농민과 청년·학생층의 참여가 두드러지기도 했는데, 이들은 격문과 통문, 선언서 배포 등의 일을 적극적으로 맡았다. 또 한편으로 윤원세(尹元世)[1890~1939]와 같은 천도교인이나 승려, 목사 등 종교인이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양주군민들의 적극적 참여는 군민들의 정치의식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어 많은 사회단체가 결성되었다.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1920년대 이후의 항일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양주군 내에서 학생·청년 운동, 노동·농민 운동, 이상촌 운동, 사회주의 운동 등이 있었으며, 양주군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와 관련한 많은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학생·청년 운동으로서는 1922년 2월 창립된 양주천도교청년회, 계몽 활동을 목표로 유양엠웟청년회, 양주청년회, 회천청년수양회 등이 설립 운영되었다. 1925년 3월에는 이사항(李思恒) 등이 발기하여 양주군 내 공회당에서 소작농회를 결성하였는데, 회장으로는 이사항, 부회장 윤원세 등이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11월에는 양주군 금융조합원 700여 명이 일본인 이사 등이 행한 경제적 수탈과 인격적 모독, 월급 연체 등에 대하여 파업을 단행하였다. 1933년 5월 군내 150여 명의 소작인들이 소작쟁의를 일으킨 이래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에 대응하면서 쟁의가 급증하였다. 한편 당시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김용기(金容基) 목사는 봉안마을 이상촌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생활 개선과 문맹 퇴치 운동 등 농촌 계몽 운동을 다시금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국외 독립운동과 관련한 양주 출신 인물로 김인근(金仁根)[1886~?]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특파원 오희문(吳熙文)·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남면 황방리 출신 이순승(李順承)[1902~?]은 1923년 상해로 망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과 한국혁명여성동맹 조직 등에 참여하는 등 한국독립당원으로서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양주 출신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꼽히는 인물은 조소앙(趙素昻)[1887~1960]이다. 그는 남면 황방리 출신으로, 형 조용하(趙鏞夏), 동생 조용주(趙鏞周)·조용한(趙鏞漢)·조용원(趙鏞元), 아들 조인제(趙仁濟) 등 그의 집안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한편 광복군에 참여한 인물로는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 본부 구호대에서 활약한 박금녀(朴金女)[1926~?] 등이 있다.

이외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사후 양주시 관내에 묘역을 정한 이들도 많다. 서민호(徐珉濠)[1903~1974]는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공원묘지에, 월남 이상재(李商在)[1850~1927]는 삼하리에, 전진한(錢鎭漢)[1901~1972]은 일영리에,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최성모(崔聖模)[1874~1937] 목사는 교현리에 안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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